“일본은 역사에 눈감지 말고, 한국은 유연한 자세 가져야”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은 일본의 퇴행적 역사 인식을 비판하면서도 한일 정치지도자끼리 가급적 빨리 만나 우호협력의 길을 모색하고, 언론은 차분하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최근 일본의 퇴행적 역사 인식과 꼬여가는 한일 관계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기 위해 24일 공 전 장관이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 종로구 효자동의 동아시아재단을 찾았다. 그는 22일부터 사흘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한일(韓日)포럼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공 전 장관은 양국 정치인, 경제인, 전직 관료, 학자, 언론인 등이 참여하는 한일포럼 한국 측 회장을 2003년 8월부터 10년간 맡아오다 올해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넘겨주고 고문으로 추대됐다. 이 포럼은 시작할 때부터 한국국제교류재단과 일본국제교류센터가 도움을 주고 있다.
―올해 한일포럼 분위기부터 소개해 주시죠.
日좌절감-위기의식에 역사인식 퇴행
―일본의 역사 인식이 20년 전과 비교해 봐도 거꾸로 가는 듯한데 이유는 뭘까요.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불황에 따른 국민적 좌절감과 중국의 급성장에서 오는 위기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일본 보수세력 일부에서 2차 세계대전 패전 후의 이른바 ‘자학사관’을 극복하고 일본의 전통과 자긍심을 부활하려는 흐름이 뚜렷합니다. 특히 ‘전후(戰後) 체제로부터의 탈피’를 내건 아베 체제 출범 후 그런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자학사관 탈피 움직임과 맞물리면서 식민통치를 반성해온 기존의 흐름에 저항하는 세력이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과 독일의 대조적인 태도가 자주 거론됩니다. 두 나라의 그런 차이는 어디에서 온다고 보십니까.
조속한 정상회담-정치지도자 교류 필요
―요즘 한일 관계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종전에는 ‘셔틀 외교’로 불릴 만큼 정상 간의 왕래가 잦았는데 지금은 정상 간에 만날 수 있는 전망도 안 보이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지요. 우리로서는 역사 인식 때문에 이웃으로서 마음 편하게 대할 수 없게 돼버려 정상회담도 쉽지 않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올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아베 총리는 같은 날 그에 상응하는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몰자 추도식에서 역대 총리가 꼭 언급했던 피해국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표현은 모두 빼버리고 일본 국내만을 위로했으니 엇박자가 된 셈이죠. 다만 정치는 냉각됐지만 한류가 좀 시들해지는 것을 제외한다면 아직 경제는 괜찮은 것 같아요. 양국 간 연간 교역액이 1000억 달러를 넘고 기업 간 협력도 활발하지요. 정냉경열(政冷經熱)이라고나 할까요.”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일본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에서 망언도 자주 있었지만 큰 흐름은 반성이었습니다. 얼마 전 정권을 내놓은 민주당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베 총리와 정당이 같은 자민당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런 흐름이 아베 정권 출범 후 크게 후퇴하고 있습니다. 국교 정상화 이후 50년 가까이 쌓아놓은 공든 탑을 지금 와서 왜 무너뜨리려고 하느냐, 아베 총리에게 묻고 싶습니다. 역사 인식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어렵습니다. 최근 한일 관계가 냉각되면서 미국이 부담을 느끼고 일본 측에 과도한 민족주의 행동을 자제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무라야마 담화나 고노 담화를 흔들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공 전 장관은 한일 관계 복원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런 인식에 동의하면서도 일본이 계속 엇길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는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공 전 장관에게 이 딜레마에 대해 물어봤다.
“한일 두 나라 모두 최근 ‘서로 담 쌓고 살자’는 분위기까지 나타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로서는 지금 북한의 핵을 없애는 것이 지상과제이고 언젠가는 통일로도 가야 합니다. 그럴 때 일본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중국의 급부상에 따라 안보를 포함한 우리 생존을 위해서도 바람막이가 필요합니다. 한미 동맹과 한일 우호협력이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몰라도 우리는 슈퍼파워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힘이 없는 게 현실입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을 제쳤다고 하지만 경제적 내실에서는 여전히 일본이 단연 돋보입니다.”
위안부, 日정부 차원 사죄-보상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일본은 1993년 고노 담화를 내놓기 전 직접 한국에 와서 조사를 했고 미국에 가서까지 자료를 찾았습니다. 자치성 차관 출신의 엘리트 관료인 이시하라 노부오 관방 부장관이 실무지휘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강제 동원의 직접적 증거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이 ‘무슨 위안부냐, 성노예지’라고 일갈하지 않았습니까.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국제사회에서 인권 문제로 부상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살아있는 동안 일본이 정부 차원의 보상과 적절한 사죄를 통해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이나 집단적 자위권 확보, 국방군 창설 움직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한국이나 중국 일각에서는 ‘군국주의의 부활’이니 하는 말도 나옵니다만….
“그 문제는 역사 인식이나 위안부 문제와는 별도로 일본의 내정 문제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군국주의 부활’ 같은 말은 지나칩니다. 군국주의 부활이나 침략전쟁을 미국이 허용할 리 없고 일본 내에서도 헌법 개정 같은 문제는 앞으로 우여곡절이 많을 겁니다. 역사나 위안부 문제 같은 것은 우리와 직결되는 만큼 대응하지 않을 수 없지만 일본의 내정 문제는 가급적 일본에 맡겨두고 과잉반응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침략을 경험한 주변국들의 우려를 덜어주기 위해 일본 정부는 사전에 충분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론 무조건적 日때리기 자제했으면
―언론은 어떻게 보도하고 논평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정치 지도자나 언론은 여론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갈 의무가 있습니다. 맹목적으로 일본을 비판하기보다는 한일 양국의 우호협력이 우리의 국익에 기여한다는 인식을 갖고 사안을 복합적으로 봐주길 부탁합니다. 무조건적인 일본 때리기나 센세이셔널한 보도와 논평은 자제하고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명백히 가리는 것이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렇게 하는 게 두 나라 공동번영은 물론이고 역내의 평화와 안정에도 도움이 됩니다.”
공 전 장관은 남북고위급회담 대표로 북한과 1년가량 협상을 벌인 경험이 있다. 또 어린 시절 서울로 왔지만 함북 명천이 고향이다. 그에게 대북정책에 대한 견해를 물어봤다.
“북한은 지금까지 똑같은 패턴을 반복했습니다. 남북 간에 합의했다가 수가 틀리면 파기하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협상을 제의하는 식이죠. 개성공단 문제도 과거 합의가 없어서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잖아요. 이번에 일단 재개 쪽으로 가닥이 잡혔지만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대북 정책에서 원칙을 중시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잘한다고 봅니다. 북한과 협상할 때는 순진한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북한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국 중국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할까요.
“미국은 우리 안보에 필수적인 동맹국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미국과는 확고한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중국과의 협력이 커지는 것도 당연한 흐름입니다. 한미 동맹과 한중 협력이 반드시 서로 상치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일본에서는 한국과 중국이 가까워지면서 일본을 배제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중국과의 협력 강화가 일본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두 시간 넘게 인터뷰를 하는 동안 공 전 장관에게서 81세라는 나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답변은 거침없었고 기억도 또렷했다. 한국과 일본, 양쪽 모두를 깊이 아는 외교 원로의 진단과 처방이 지나치게 얼어붙은 한일 관계를 풀어나가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권순활 논설의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