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과거시험장 요지경 풍경
고산 윤선도가 1612년 진사시 복시에 응시해 써낸 답안지. ‘눈을 맞으며 고산(孤山)을 방문하는 시’를 제목으로 하여 시를 썼다. 윤선도는 이 답안지로 응시생 100여 명 가운데 2등으로 합격했다. 출처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시험 답안지에 지어 넣은 시 구절 치고는 솔직하고 자유분방하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시인 고산 윤선도(1587∼1671)가 25세 때 응시한 과거시험에서 써낸 시의 일부다. 윤선도는 1612년 진사시(시와 부 창작능력을 평가하는 시험) 복시(2차 시험)에서 이 시를 지어 응시생 100여 명 가운데 2등으로 합격했다.
출제된 시제(試題)는 ‘눈을 맞으며 고산(孤山)을 방문하는 시’. 북송의 시인 임포(967∼1028)가 중국 항저우(杭州)의 고산에서 은거했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답안지에서 윤선도는 속세를 벗어나 고결하게 은거한 임포를 드높이며 “선생의 고결한 덕은 흰 눈에 비견되니, 역경에도 변하지 않는 지조를 깊이 우러러보노라”라고 노래했다.
논문에는 조선시대 문신이자 학자인 우암 송시열(1607∼1689)이 26세이던 1633년 생원시(유교경전 지식을 평가하는 시험) 복시에 쓴 답안지도 있다. 시험문제는 알 수 없으나 송시열은 이 답안지에서 한자 176자, 원래 선하지만 탁한 기질에 의해 흐려진 성(性)을 배움을 통해 온전히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질(氣質)에는 밝음과 어두움이 있고 물욕에는 많음과 적음이 있으니, 어두움을 고쳐서 밝음에 이르는 것은 ‘배움’이 아니겠으며 많음을 고쳐서 적음에 이르는 것은 ‘배움’이 아니겠습니까.…”
조선 후기에 들어 과거시험 응시자 수가 급증하면서 시관(채점자)들이 일찍 제출된 답안지 위주로 앞부분 몇 줄만 읽어보고 점수를 매기는 폐단이 생겼다. 이 때문에 응시자들은 남보다 먼저 답안지를 내려고 다투었다.
논문에 따르면 응시자들은 시험장에 들어설 때부터 시험문제를 걸어놓는 판이 잘 보이는 앞자리를 잡으려고 소동을 벌이다 다치기도 했다. 답안을 빨리 작성하려고 집에서 모범답안을 토대로 미리 얼토당토않은 글귀를 띄엄띄엄 적어 와서 시험문제를 보고 빈 자리를 메워 써내기도 했다. 답안지를 걷는 수권소(收券所) 군졸을 매수해 자신의 답안지를 앞부분에 끼워 넣기도 했다.
과거시험 답안지가 지금도 많이 남아있는 것은 합격자에 한해 소장용으로 답안지를 돌려받았기 때문이다. 낙방자의 답안지는 어떻게 됐을까. 김 박사는 “조정에서 불합격 답안지를 모아 군부대에 보내 겨울철 군인들의 군복 속에 솜 대용으로 넣어 쓰게 하는 등 다양하게 재활용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