벡신스키, 무제, 1976년
이 그림에도 섬뜩하고 괴기한 벡신스키 화풍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불타는 도시에서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가 시신들의 파편이 널려있는 거리를 힘겹게 기어가고 있다. 인간이기보다는 상처 입은 한 마리 흉측한 거미를 떠올리게 한다. 팔다리는 앙상하고 몸은 새까맣고 얼굴은 붕대로 감겨 있으며 그 붕대에서 붉은 핏물이 스며 나오고 있다.
지구의 종말을 그린 것일까? 아니면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지옥의 유황불을 그린 것일까?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 도시를 탈출하는 유일한 인간을 그렸는데도 왜 희망이 아닌 절망감이 느껴지는 걸까?
사람들이 자주 질문하는 것 중의 하나, 이 세상에 현실의 공포가 그렇게나 많은데도 왜 당신은 무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현실의 공포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공포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은 우리가 왜 공포와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벡신스키의 그림에 매혹당하는지 알려준 셈이다. 공포는 사회가 인간에게 억제하라고 요구하는 반사회적인 행동, 성욕, 폭력성이라는 유해가스를 배출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이명옥 한국사립미술관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