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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기 아웃”… 엽기와 유희, 자유와 파격의 딴죽걸기

입력 | 2013-08-27 03:00:00

英작가 채프먼 형제 국내 첫 전시회




‘영국 미술계의 악동’으로 불리는 채프먼 형제가 참혹한 살육의 현장을 사실적인 입체 모형으로 표현한 ‘No woman no cry’의 일부. 전쟁 학살 죽음을 소재로 한 이들의 작품은 서사적 이야기와 치밀한 세부 묘사가 특징이다. 송은아트스페이스 제공

남극 펭귄이 북극곰과 고래를 먹어치우는 장면이 담긴 입체 모형, 19세기에 제작된 부유층 초상화의 얼굴을 왜곡 변형한 그림, 맥도널드 캐릭터를 아프리카 유물처럼 표현한 조각, 코에 성기가 달리거나 오리 주둥이를 가진 돌연변이로 아이의 순수성에 대한 환상을 허무는 설치작품….

서울 강남구 청담동 송은아트스페이스의 3개 층을 채운 영국 작가 채프먼 형제의 ‘The Sleep of Reason’전은 ‘예술은 아름답고 보편적이고 진실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1990년 영국 왕립예술학교 졸업 이후 공동작업을 해 온 동생 제이크(47)와 형 다이노스(51) 형제의 국내 첫 개인전으로 회화 조각 드로잉 등 45점을 선보인 자리다.

일찍이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의 판화 ‘전쟁의 참상’을 정교한 입체모형으로 제작해 주목받은 형제답게 전시 제목을 고야의 판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에서 따왔다. 관습과 금기, 질서에 딴죽 거는 작업을 아우른 전시에선 엽기와 유희, 잔혹함과 유머, 자유와 파격의 무한 변주가 펼쳐진다. 12월 7일까지. 무료. 02-3448-0100

○ “우리는 유쾌한 운명론자”

공동작업을 하는 동생 제이크(왼쪽), 형 다이노스 채프먼 형제. 송은아트스페이스 제공

대량학살, 죽음, 섹스, 물질문화를 소재로 시각적 극단을 추구한 작품들은 보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작가들은 유머와 장난기가 철철 넘쳤다. 22일 전시장에서 만난 형제는 빡빡 깎은 머리에다 온몸에 문신을 한 모습으로 농담을 주고받다가도 작품 얘기가 시작되면 불교의 공(空) 사상부터 에로티즘의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를 오가며 명쾌한 이론을 전개했다. 형은 간간이 거들고 대화의 8할은 동생이 도맡았다.

전시에 고야 판화를 모티브로 한 순은 조각을 선보인 형제에게 고야를 좋아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종교적 도상에 인간의 심리적 요소를 끌어들인 최초의 화가로 새로운 표현영역을 개척했다. 계몽은 이성을 맹신하게 만들었지만 고야는 그렇지 않았다.”(동생)

영국의 남성 2인조 작가 ‘길버트 앤드 조지’의 조수 생활을 한 형제는 작업할 때 역할분담을 하지 않는다. 동생은 “서로의 개성을 녹여 일관성을 유지하는 길버트 앤드 조지와 달리 우리 작업의 핵심은 각기 다면성을 확대하는 정신 분열적 측면”이라고 강조했다.

비참하고 암울한 작업이란 평가에 대해선 형은 “우리는 비관론자가 아닌 유쾌한 운명론자”라며 “서구의 역사적 뿌리를 거슬러보면 기독교의 출발 자체가 삶의 긍정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신의 죽음에서 태어난 것 아닌가. 악이 있으니 구원도 가능한 법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 관습과 금기에 질문을 던지다

이번에 처음 공개된 신작 회화는 생전에 권세와 부를 누리던 사람들이 자기 과시를 위해 주문제작한 초상화에 흉측하게 덧칠함으로서 ‘소멸’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이를 왜곡된 형상으로 표현한 작품도 충격적이다. 어린이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실은 성인들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것 아닌가란 물음이 담겨 있다.

“예술 행위는 파괴적이고 악의적인 것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는 부정적 측면에 고착돼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인간이 양심과 자아성찰, 도덕이 있는 존재라는 생각에 대해….”(동생) 고야처럼 악에 지지 않기 위해 악을 소재로 삼은 작업은 세계의 부조리와 인간의 오류를 냉철하게 직시하라고 들려준다.

형제는 “예술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왜 예술가의 길을 택했을까. “예술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자유로운 공간(이기 때문)”이란 답이 돌아왔다. 냉소적 유머와 위악적 표현으로 역사의 과오와 인간의 악덕을 비판한 작업은 도발적이지만 그 목소리는 진지하고 진솔하다. 그것이 불쾌한 선동인지, 통쾌한 역발상인지 판단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