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속 아이처럼 이젠 활짝 웃었으면…”
전남 나주시 영산강 인근의 한 동네 골목길 벽면에 모녀가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 골목길은 지난해 8월 30일 오전 1시 반 고종석이 A 양(당시 7세)을 납치한 뒤 성폭행할 장소로 가기 위해 지나간 길이다. 나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이 동네는 1년 전인 지난해 8월 30일 오전 1시 반 고종석(24)이 집에서 잠을 자던 A 양(당세 7세)을 이불째 들어 납치한 뒤 성폭행하고 살해하려고 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모녀 그림이 있는 골목길은 A 양 집과 바로 지척에 있고 고종석이 범행 당시 지나갔던 길이다.
인구 8만 명의 나주는 당시 고종석 사건으로 큰 충격에 빠졌다. 나주지역 문화 봉사단체 ‘때깔’은 지난해 11월부터 A 양 가족과 이웃들이 받은 상처를 씻어주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그중 하나가 사건이 일어난 동네를 벽화로 꾸미는 ‘아이사랑 희망그리기’ 사업이었다. 올해 2월부터 인터넷으로 자원봉사자를 모으고 소액기부를 받아 사업을 진행했다. 이 동네 주민 120명은 4월 23일 하루 만에 자신의 집이나 상가의 벽에 그림을 그리는 것에 동의서를 써줬다.
이날 범행 현장 인근에서 만난 나주 시민들은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라고 입을 모았다. 경로당에서 만나 정모 씨(81·여)는 “고종석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섬뜩하다. 그나마 모녀 벽화 등 그림이 그려지면서 동네 분위기가 나아졌다”고 전했다. 택시운전사 이모 씨(57)는 “우리 사회는 대형사건이 터져도 한 달이면 잊혀진다”며 “다시는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낙현 때깔 대표(43)는 “벽화 덕분에 분위기가 좋아져 요즘 주민들이 밤에 아이들과 함께 산책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며 “벽화가 고종석이 남긴 상처를 지우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벽화 속의 행복한 모녀와 달리 A 양 모녀와 가족들은 여전히 1년 전 사건으로 고통받고 있다. A 양과 그 가족들은 사건 직후 나주를 떠나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보금자리를 옮겼지만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아동성폭력 추방을 위한 시민모임인 ‘발자국’ 측은 A 양이 요즘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릴 때가 많다고 전했다. 신체적으로는 거의 회복했지만 정신적 후유증은 여전하다는 것. A 양의 아버지는 현재 병원에 입원 중이며 엄마가 혼자 4남매를 키우고 있다. A 양은 악몽으로 인한 두려움으로 뜬 눈으로 밤을 자주 새워 학교를 가도 제대로 수업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주위에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현정 발자국 활동가(35·여)는 “A 양 부모가 자녀들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는 등 사실무근의 헛소문으로 부모는 물론이고 자녀들도 큰 상처를 입었다”며 “A 양과 가족 모두 성폭행 사건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도록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나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