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옥주(1958∼)
몇 개의 숫자 속에서 나는 숨지 못한다
무수한 기억을 뚫고 네가 나를 추적해 올 때
뇌세포보다 더 많이 입력된 정보와 영상 사이로
나는 아무 기억도 상상력도 없다
파묻힌 찬 세월 속에
얼음공주 미이라 손가락의 문신처럼
움찔거리며 살아나는 네 그리움을 이해할 수 없다
죽었던 모기가 다시 살아난다면
해체된 지뢰가 다시 폭발한다면
끝난 사랑이 다시 불붙는다면
나는 갈갈이 찢어지고 말리
날 찾지 마
빠득빠득 잊혀지고 싶어
부족함이 가득한 이 세상
지난 시간을 내게 남겨 줘
묻힌 인연들이 제가 세운 둥지를 틀어 안고
흘러간다
흐르는 대로 흘러가면 좋으리
멀쩡하게 살다가 느닷없이 옛날 친구나 옛날 애인을 찾는 병이 도질 때가 있다. 가슴이 욱신거린다.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으로도 욱신거리고 젊은 날의 자신에 대한 그리움으로도 욱신거린다. 그토록 가까웠건만, 이제는 자기가 그의 인생에서 너무도 오랜 세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걸 새삼 깨달아서도 욱신거린다. 그렇지만 틀림없이 그 사람도 내가 그리웠을 거야. 얼마나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던가. 아, 그 아름다웠던 시절, 그 아름다웠던 관계! 내 목소리를 들으면 엄청 반가워하겠지. 생각만 해도 두근두근해져서 이리저리 수소문해 드디어 전화번호를 알아낸다. 아, 그러나! 해체된 줄 알았는데 지뢰가 폭발하면 어떻게 되나? 그리움에 사무치는 목소리로 함께했던 시절의 열정을 되살리며, 혹은 재밌었던, 혹은 아름다웠던 에피소드를 끄집어내지만 화자는 그에 대해 ‘아무 기억’이 없을 뿐 아니라 ‘상상력도 없다’. 돌이켜보기도 싫은 것이다. ‘날 찾지 마!’ 당황과 아픔 속에서 화자는 애원하고 비명을 지른다. ‘빠득빠득 잊혀지고 싶다’고 한다. 너를 만나면 다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다. 나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네가 날 찾으면 어쩌란 말이냐?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