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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진영]10대가 쓰는 ‘그레이의…’

입력 | 2013-08-29 03:00:00


이진영 문화부 차장

“지용은 탑이 아까와는 다르게 온화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자 옥상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도 좀처럼 탑에게 다가가지 못하자 탑이 살짝 웃어주며 팔을 벌려 오라고 손짓했다. 지용은 조금씩 발을 떼며 탑의 품에 안겼다. …”

아이돌 그룹 빅뱅의 멤버인 지드래곤(본명 권지용)과 탑(최승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팬픽 ‘어린 위안부’를 읽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안부를 성애(性愛)물의 소재로 택한 무딘 역사적 감수성이 딱하기도 했지만 이보다 더 놀라웠던 건 200자 원고지 1470장을 가득 메우는 온갖 변태적인 성행위였다.

팬픽(fanfic)이란 팬(fan)이 쓰는 픽션(fiction·소설)의 줄임말이다.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를 실명 그대로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 간다. 창작과 유통이 쉬웠던 1990년대 PC통신 시절부터만 따져도 역사가 20년이 넘는다. 포털 다음엔 1만6400개의 팬픽 카페가 있다.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신화 같은 인기 그룹은 팬픽 카페도 여럿이고, 회원 수도 카페마다 10만 명이 넘는다.

팬픽은 주로 10대 소녀들이 써서 돌려보는 콘텐츠로 99%가 동성애물이다. 가장 많이 제작되는 장르가 남자 동성애를 다루는 ‘야오이물’이다. 이 중에서도 ‘어린 위안부’처럼 수위가 높은 것은 ‘장미물’이라 따로 부른다. 여자 동성애를 남성적 시각에서 쓴 작품은 ‘레즈물’, 여성적 시각으로 쓰면 ‘백합물’이다.

장미물보다는 덜하다지만 야오이물의 수위도 만만치 않다. 일본어인 ‘야오이’가 ‘야마(山)’ ‘오치(落)’ ‘이미(意味)’가 없다는 뜻에서 세 단어의 앞 음절을 따 지은 어원으로 짐작할 수 있듯 작품성을 따지기보다 성애 묘사에 집중하는 것이 이 장르의 특징이다. 남자 커플은 성관계를 주도하는 공(攻)과 반대편의 수(守)의 역할을 나눠 맡는다. god에서 남성적인 윤계상이 ‘공’을, 섬세한 손호영이 ‘수’를 맡아 ‘호상’ 커플을 이루는 식이다. ‘어린 위안부’는 ‘탑뇽’ 커플의 사랑 얘기로 예쁘장한 지드래곤이 여장을 한 채 위안부로 끌려가는 ‘수’, 선이 굵은 탑은 일본군 장교인 ‘공’으로 나온다.

남남 커플이 팬픽의 주류를 이루는 이유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제기된다. 대개 팬픽의 주요 생산자이자 소비자들이 10대 소녀임을 전제로 한 설명들이다. 우선 ‘울 오빠’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걸 보기 싫어서, 혹은 사회적 금기를 뛰어넘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더 극적이어서라는 것이다. 남자들만의 사랑 얘기는 여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할 필요 없이 관찰자 입장에서 관음 욕구를 채울 수 있어서, 남성적인 ‘공’부터 탈권력화된 ‘수’까지 다양한 남성성을 즐길 수 있어서라는 다소 어려운 해석도 있다. 라캉의 욕망이론에 기대어 소녀들의 성적 판타지가 갖는 ‘전복적인 힘’에 주목하는 여성학자들도 있다.

팬픽의 생산과 소비 동기야 어떻든 확실한 건 요즘 10대들의 성적 지능이 어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이다. 팬픽은 공부 못하는 ‘빠순이’들만의 문화가 아니다. 외고생도 쓰고 읽고, 팬픽 잘 써서 대학 가는 이들도 있다. 어른들이 일부 성행위 장면을 이유로 해외 명작들을 ‘청소년 유해물’로 분류하는 동안, 10대 청소년들은 입이 떡 벌어지는 성애물을 만들어내고 있다. 소년소녀들의 잇단 범죄를 계기로 형법상 죄를 지어도 책임을 묻지 않는 촉법소년(觸法少年)의 나이 기준을 낮추자는 주장이 나오듯, 일정 수위의 내용을 봐도 되는 성적인 촉법소년 연령도 낮춰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는 소설 ‘젊은 느티나무’의 첫 문장에 밤잠을 설치던 성적 감수성으로는 ‘엄마용 포르노’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보다 더한 그림을 상상해내는 10대들을 따라잡기 어렵다.

이진영 문화부 차장 eco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