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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신의의 소중함 배웠으면”

입력 | 2013-08-29 03:00:00

가족이 함께 읽는 ‘만화 삼국지’ 全10권 펴낸 이현세 작가




온 가족이 읽을 수 있는 ‘만화 삼국지’(전 10권)를 한꺼번에 펴낸 이현세 씨는 28일 “어린이들이 뛰어노는 그 골목에 만화 삼국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스케일이 작아지는데 야성의 DNA를 만화로 일깨워 주고 싶다”고 말했다. 녹색지팡이 제공

1962년 여덟 살 소년은 누전 사고로 생부를 잃었다. 이미 갓난아기 때 돌아가신 큰아버지 댁의 양자로 들어가 살던 그는 철들 때까지 그때 숨진 생부가 작은아버지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 그가 뛰놀던 골목길은 사내아이들의 전쟁터였다. 아버지 그늘을 모르고 형제도 없이 자란 소년은 혼자 살아남아야 했다. 사내는 이렇게 커야 한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소년은 영웅, 스포츠 만화를 보며 사랑 도전 승리 정의를 배웠다. 그리고 영웅호걸이 등장하는 ‘삼국지’를 꼭 만화로 그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소년은 자라 환갑을 앞두고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 ‘공포의 외인구단’ ‘남벌’의 작가 이현세 씨가 ‘만화 삼국지’(전 10권·녹색지팡이)를 펴냈다. 기획과 자료 준비에 2년, 그림을 그리는 데 3년이 걸렸다. 이 씨는 28일 서울 경운동 한 음식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아들이 아버지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를 만화에 담았다.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 인간관계에서 소중한 믿음과 의리를 어린이에게 알려주고 싶다”고 말했다.

널리 알려진 ‘고우영 삼국지’가 성인용 만화라면 ‘만화 삼국지’는 온 가족이 읽을 수 있는 만화다. 전쟁 장면이나 책략가의 두뇌싸움보다는 영웅이 되거나 패자로 전락한 인물 묘사에 주력했다. 이현세식 ‘삼국지 인물 분석집’인 셈이다. “한 번도 배신하지 않은 조자룡과 배신을 일삼는 여포를 대조해서 그리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게 했죠. 제갈공명 대 노숙, 관우 대 장료 등 등장인물끼리 갈등을 보며 어떤 사람으로 커야 할지 고민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씨가 가장 애착을 지닌 인물은 조자룡이다. 단골 주인공 ‘까치’ 캐릭터도 조자룡에게 할애했다. 그는 “조자룡은 ‘생각이 없는 인물’이라서 좋다. 순수한 칼잡이, 주군에 대한 충절, 전투를 신나게 즐기는 어린이 같은 모습을 그에게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선 조자룡이 아파서 숨을 거두지만 그의 만화에선 스스로 숲으로 떠나는 한 마리 호랑이로 그려진다. 이 씨는 “살리고 싶은 인물은 정사와 관계없이 그렸다. 목이 잘린 장비가 술을 마시며 죽는 장면도 그의 호쾌함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현세의 ‘만화 삼국지’의 주요 등장인물. 왼쪽부터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위) 주유 여포 조자룡 조조. 녹색지팡이 제공

만화 속 캐릭터만 봐도 그가 인물의 어떤 특성을 잡아내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소통과 화합의 지도자 유비는 만화 속 ‘수도꼭지(울보)’란 표현에 어울리게 유약하게 그려졌고, 자존심 세고 포용력이 부족한 관우는 긴 수염에 팔자수염을 더해 완고한 인상으로 그렸다. 반면 푸줏간 주인 같은 장비는 관우와 대비되는 코믹한 이미지다. 유비의 라이벌 조조와 손권은 각각 카이저수염을 기른 카리스마 덩어리와 붉은 수염을 기른 당당한 체구의 멋쟁이로 그려졌다.

만화는 10권이 한꺼번에 출간됐다. 한 권씩 연재하며 시장의 반응을 살피기보다 한꺼번에 출간한 것도 출판사와 작가의 신의 덕분이란다. 길고 긴 삼국지를 만화책 10권에 담기 위해 처음으로 내레이션 방식을 시도했다. 이 씨는 “글맛을 살려 단어나 문장을 꼼꼼히 신경 썼다. 어린이들이 멋진 말을 따라 하며 어휘력을 키우길 바란다”고 기대했다.

2000년대 초 ‘천국의 신화’ 음란물 논란으로 홍역을 겪고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그는 “다시 돌아오고 나니 사람들이 나를 알아도 내 만화는 보지 않았다. 어린 독자부터 다시 잡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어린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얼마 전 허영만 씨도 ‘허허 동의보감’을 출간했다. 라이벌 의식이 있지 않을까. “혼자 주로 지내며 자기관리가 철저한 허 선배가 호랑이라면, 무리지어 어울리길 좋아하는 저는 사자입니다. 사는 영역이 달라요. 하하.”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