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릿 다른 삶에 마음이 동했다… 짜릿 나보다 더 즐거울 순 없을 걸
매달 넷째 주 금요일 서울 구로구 구로동 구로근린공원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함께하는 동네 장터’인 ‘별별시장’이 열린다. 별별시장을 기획한 박종호 씨가 좌판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병원에서 새 삶을 얻다
“괜찮아요?”
왜 사고가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왼손에 남은 50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화상 자국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보여줄 뿐이었다.
지방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회사에 들어갈 때만 해도 “요즘 취업하기 어렵다는데 참 장하다”는 얘기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었다. 국내 굴지의 자동차회사의 1차 협력업체였다. 급여도 나쁘지 않았다. 연봉은 3000여만 원. 중소기업치곤 많은 편이었다.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면 50만 원씩 부모님에게 보냈다.
하지만 일이 고됐다. 단기 프로젝트를 맡을 때면 자정 넘어 퇴근하는 게 기본이었다. 석 달 동안 단 하루만 쉬고 일하기도 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내가 바라던 삶이 과연 이런 것이었나?’
병실 생활은 따분했다. 문병 온 동료나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것도 잠시, 그들이 돌아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럴수록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몸이 근질거렸다.
문득 내 방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들이 떠올랐다. 한비야 씨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법정 스님의 ‘무소유’, 고 장영희 교수의 ‘내 생에 단 한 번’…. 부모님에게 몇 권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먼지 쌓인 곳에 처박혀 있던 책들은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복잡한 프로그램 언어나 회로도가 알려주지 않는 다른 세상이 있었다. 그렇게 45일가량의 병원생활을 포함해 4개월간의 병가(病暇) 기간에 70여 권의 책을 읽었다.
구로는 예술대학’을 책임지고 있는 박종호 윤혜원 최윤성 하은혜 씨(오른쪽부터). 이들은 ‘구로스타일’이 동네 전체에 퍼지기를 꿈꾼다. 박종호 씨 제공
이곳에선 자신을 설명할 때 직장, 스펙, 연봉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전통시장 어귀에 좌판을 차려놓고 채소를 파는 할머니, 복덕방에서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 무심코 지나쳤던 이들에게 오히려 더 큰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지금 다니는 직장이 삶의 전부라고 여겼던 믿음에 조금씩 균열이 생겼다.
구로지역은 변화하고 있었다. 구로공단으로 기억되는 굴뚝 공장지대는 아파트형 공장으로 탈바꿈했고 낮은 가옥들은 아파트로 바뀌고 있었다. 주민들은 깔끔하게 정리돼 가는 겉모습과는 달리 마음의 거리를 느꼈다. 주민들은 야산에 철쭉을 심었다. 철로변의 방음벽에는 벽화를 그렸다. 동네마다 자생적인 모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삭막해진 도시를 주민들의 힘을 통해 따뜻하게 바꾸고 싶었다. 구로예대는 이런 움직임에 힘을 보태려던 참이었다.
‘이런 변화의 흐름에 나도 함께하고 싶다.’
2010년 7월 회사에 사표를 냈다. 미련은 없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는데….’ 버리는 일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3년이 흘렀다.
○ 직장인에서 구로의 ‘삐융’으로
“삐융, 의자가 부족해.”
“삐융, 여기 콘센트를 꽂을 곳이 없대.”
23일 오후 5시 15분경 서울 구로구 구로동 구로근린공원. 노란색 앞치마를 걸친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삐융’을 찾았다. 동네 장터인 ‘별별시장’이 열릴 시간이 15분이나 지났지만 준비를 마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어딘가에서 나타나 빠른 손놀림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한 청년이 있었다. 박종호 씨(31)였다. 자동차부품회사에서 촉망 받는 엔지니어였던 박 씨는 구로근린공원을 누비는 ‘삐융’이 돼 있었다. 누군가 부르면 ‘삐융’ 하고 어느 새 나타난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짙은 붉은색 체크무늬 긴팔 셔츠를 팔꿈치까지 걷고 검은색 빛바랜 반바지 차림에 구멍이 숭숭 뚫린 고무 슬리퍼까지 신고 있었다. 영락없는 동네 아저씨였다.
별별시장은 박 씨가 처음 제안한 것이다. 영등포구의 ‘달시장’처럼 구로에도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장터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박 씨는 올해 초 구로 마을 만들기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자리에서 이런 생각을 꺼냈다. 구로구청을 비롯해 구로문화재단, 구로생협 등이 흔쾌히 협조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공연에 나설 팀은 구로문화재단이 섭외하고 구로생협은 먹을거리 장터를 지원했다.
‘마을에 사는 별의별 사람들이 함께하는 시장’이라는 의미를 담은 별별시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6월 처음 열린 별별시장은 매달 넷째 주 금요일 동네 주민들이 찾아오는 소박한 문화행사가 됐다.
사실 박 씨는 구로지역과는 연고가 없는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구로예대 프로그램은 그를 서서히 바꿔놓았다. 구로예대엔 박 씨처럼 새로운 것을 찾는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20대 대학생부터 백수, 30대 직장인까지 다양했다. 저마다 찾아온 사연은 달라도 목적은 같았다. 관계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박 씨는 2012년부터 구로예대를 담당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 나섰다. 해를 거듭하면서 프로그램도 풍부해졌다. 정해진 커리큘럼은 없었다. 수강생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즐기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뉴요커잖아요. 그러면 구로에 사는 사람은 ‘구로커’지요. 구로커를 위한 잡지를 만들면 어떨까요?”
수업 중에는 이처럼 참신한 아이디어도 종종 나왔다. 물론 모든 수업의 초점은 ‘생기 있는 마을 만들기’에 맞춰져 있었다. 박 씨와 수강생들은 함께 전통시장으로, 골목으로 생활의 지혜를 전해줄 마을 선생님들을 찾아 나섰다. 이웃집 할머니는 ‘밥상머리 교육’을, 부동산 아저씨는 ‘월세방 컨설팅’을 전수해줬다.
평소 젊은이들과 말을 섞을 일이 많지 않던 어르신들의 일상에도 변화가 생겼다. ‘장어보다 유연해지는 룸바 교실’의 장어음식점 사장님은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수업 전날엔 삼가기 시작했다. “젊은 친구들이 뭐라도 배우겠다고 날 찾아오는데 술 냄새를 풀풀 풍길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 어설퍼도 좋다, 함께하니까
별별시장이 열리는 구로근린공원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시끌벅적했던 사람들의 웃음소리, 흥정하는 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마지막 공연자가 공원 한쪽에 마련된 무대에 섰다. 기타를 들고 목에 하모니카를 건 중년 남성이었다.
“이곳에서 만나는 모두가 이웃이잖아요. 버스에서나 동네 슈퍼에서 볼 수 있고. 이 만남을 모두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만남’을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운을 뗀 그는 첫 소절을 부르다 갑자기 멈췄다.
“키를 너무 낮게 잡았네요. 다시 부르겠습니다. 괜찮지요?”
무대를 둘러싼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우리가 만드는 행사가 ‘현대카드 슈퍼콘서트’처럼 될 순 없어요. 어설프고 실수도 많은 게 당연하지요.”
박 씨와 함께 ‘구로예대’에서 활동하는 윤혜원 씨(26·여)가 말했다. 윤 씨는 대학을 나온 뒤 일반 회사에서 겪는 상하관계가 싫어 글을 쓰는 프리랜서로 활동하다가 올해 초 이곳에 합류했다. 하은혜 씨(29·여)와 최윤성 씨(23·여)도 비슷한 사연을 갖고 있다. 이들에게는 믿음이 있다.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이 모여 놀면 그게 스타일이 되고, 그곳이 구로라면 ‘구로 스타일’이 될 수 있다는.
박 씨는 월수입이 예전 직장 다닐 때의 절반 수준인 150만 원으로 줄었다. 함께하는 사람도 매달 100만 원 정도를 손에 쥐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곳에서 얻는 즐거움은 모자란 수입을 채우고도 남는다고 했다.
희망이 주는 기운 때문일까. 또래 젊은이들이 모일 때 단골 주제인 취업, 결혼, 스펙 같은 불안함을 불러오는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 스스로 불안정을 택했으니까. 중산층과 좋은 직장처럼 사람들이 얘기하는 ‘안정’이란 기준에 들기 위해 얼마나 불안정한 삶에 시달리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아직 미혼인 박 씨 역시 미래에 관한 고민은 접어뒀다. 올해 초에는 아예 구로구 오류동으로 이사했다. 주변을 맴돌던 이방인이 진짜 ‘구로인’이 된 것이다. 어색하기만 하던 감전사고의 상처가 이제 자신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흔적이 된 것처럼.
“미래가 꼭 거창해야 할까요? 동네 어귀에 조그만 전파상을 열고 지금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면 그만이지요.”
박창규 기자 k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