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희랍·로마의 분노론/손병석 지음/560쪽·3만2000원/바다출판사
그리스 코르푸 섬의 아킬레이온 궁전(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엘리자베트 황후의 여름궁전)의 아킬레우스 동상. 아킬레우스를 주인공으로 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전횡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한다. 바다출판사 제공
“분노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자연적인 감정이면서도 문명파괴의 폭력적인 감정이라는 야누스적 얼굴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삶의 조건이 우리를 더욱 분노하기 쉬운 호모 이라쿤두스, 즉 ‘분노하는 인간’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대중매체를 보면 온통 자신을 무시하고 속이고 짓밟는 세상에 대해 분노를 뿜어 대는 사람으로 넘쳐난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세상이 원래 다 그런 거지”라며 현실의 모순에 눈감거나 “내가 아니어도 나설 사람 많을 텐데 뭘…” 하며 개인적 웰빙을 추구하기 바쁜 이들투성이다. 분노의 표출을 일종의 병리현상으로 취급하는 자기계발서나 화를 다스리지 못하면 마음의 안식은 요원할 뿐이라는 힐링 서적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 책은 다르다. 분노의 긍정적 측면에 주목한다. “분노는 한 사회의 건강함을 포착할 수 있는 일종의 도덕적 바로미터다. …특히 한 사회가 외양적으로는 건강한 사회처럼 보여도 속으로 병든 공동체일 경우, 분노는 그것의 허상을 벗겨줄 수 있는 진실의 목소리일 수 있다. 거짓과 기만에 의해 조작된 사회를 다시 진실과 정의의 사회로 바꾸고자 하는 깨어 있는 몸짓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주장을 펼치는 저자가 고려대 철학과 교수라는 점이다. 그것도 그리스 아테네에서 10년간 고대 그리스철학을 공부하면서 헬라어와 라틴어 자격증까지 딴 인물이다. 이성을 중시하는 철학의 본고장에서 공부한 학자가 왜 분노에 주목한 걸까.
고대 그리스 문명이 지녔던 두 얼굴을 ‘분노’라는 감정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1부에서 자세히 분석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지배하는 감정은 손상된 티메(명예)를 되찾기 위한 ‘고귀한 분노’다. ‘일리아스’는 트로이전쟁의 그리스연합군 수장인 아가멤논의 부당한 권력 남용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하며, ‘오디세이아’는 20년 만에 귀향한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아내와 재산을 탐낸 자들에 대한 정당한 분노의 방출로서 끔찍한 살육으로 끝난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이나 ‘메데이아’와 같은 비극을 지배하는 감정 역시 분노다. 여기서도 분노는 인간의 오만함이나 유약함의 징표가 아니라 신성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동력이다. 다만 분노를 무차별적으로 표출할 경우 발생하는 부작용을 경고하면서 이를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안이 모색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