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마이클 레인저를 통해 본 북한 무기밀매 현장
불법 무기거래를 담당하는 것으로 확인된 북한 혜성무역 소속 오학철의 여권. 남미와 중동의 북한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기록이 남아 있다. 2004년까지 그가 사용한 여권은 고위간부에게만 발행되는 것이었다.
2012년 9월 17일 영국 런던의 한 교도소. 초로의 영국 신사가 죄수복을 입은 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파견한 전문가 패널들 앞에 섰다. 이름 마이클 레인저, 생년월일 1946년 11월 15일. 승마 전용 농장이 많은 하트퍼드셔 주의 작은 마을 뱀버그린 출신인 그는 30대 때부터 임페리얼 국방서비스(Imperial Defence Services)라는 군수물자 무역회사를 경영해온 성공한 기업인이었다. 한 지역신문이 그의 체포 소식을 주요 기사로 다루었을 만큼 그의 몰락은 드라마틱했다. 그리고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유엔 전문가 패널들에게도 낯설 정도로 흥미로운 것이었다.
외교관 여권 사용 오학철과 접촉
돌이켜 보면 이건 그의 인생에서 맞은 두 번째 위기였다. 영국에서는 ‘헝거포드 참극’으로 부르는 무차별 살인사건이 벌어진 1987년에도 그는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버크셔 주의 마이클 라이언이라는 젊은이가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해 16명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 이때 라이언이 사용한 권총이 바로 레인저가 판매한 물건이었다. 그는 당시 거래가 합법적이었음을 입증해 가까스로 법망을 피했지만, 이번에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주간동아’는 영국 검찰청의 관련 성명과 사우스워크 형사법원의 공판자료, 해당 검찰 및 법원 관계자들에 대한 e메일과 전화 취재, 최근 전문을 공개한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보고서 등을 통해 레인저와 북한 사이 무기거래 현장을 재구성했다. 사건 자체는 6월 외신을 통해 국내에도 전해진 적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레인저와 북한의 인연은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랜 기간 알고 지낸 ‘암흑세계’의 동료로부터 한 북한 무역상의 e메일 주소를 건네받은 것이 첫 시작이었다.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을 대량으로 팔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는 동료의 말은 소화기(小火器)를 주로 다뤄온 레인저에게 자못 큰 유혹일 수밖에 없었다. 잘만 하면 ‘전혀 다른 차원의 비즈니스’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지만, 그만큼 위험도 커질 게 뻔했다. 이를 잘 아는 그는 당국의 감시를 피하려고 은밀한 방법을 택한다. 허위 명의로 e메일 계정을 만들어 북한 무역상에게 첫 번째 메시지를 날린 것이다.
무기 수출 운송 루트 엄청 복잡
북한의 대표적인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 SA-7B를 사용하는 모습. Wikimedia
그에게는 동행이 두 사람 더 있었다. 이들은 이후 면담마다 오학철과 함께 자리에 나왔다. 그러나 이들은 어지간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오학철의 소속은 알고 있었지만, 이들은 속한 조직이 어디인지, 누구의 지시를 받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노출되는 거래선은 혜성무역 하나로 묶어두려는 뜻이 역력했다. 레인저는 더 캐묻지 않았고, 그들의 입술은 굳게 닫혔다.
네팔에서의 첫 만남에서 기초적인 의사를 타진했다면, 말레이시아에서 이뤄진 다음 면담에서는 논의가 한층 급물살을 탔다. 레인저가 물색에 성공한 ‘구매 후보’는 이웃 아르메니아와 오랜 분쟁을 겪고 있는 아제르바이잔. 그와 오학철은 사람들로 가득한 음식점이나 시끌시끌한 술집을 만남 장소로 활용했다. 인적이 드문 으슥한 장소에서의 ‘접선’은 아마추어나 하는 짓.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은 주변이 시끄러워 도청이 어렵고 추적도 까다로운 공공장소를 선호한다. 오학철과 두 동행이 바로 그런 이들이었다.
유엔 안보리 전문가 패널 보고서는 “실무자들의 이러한 무거운 입이 불법 무기거래에 관여한 기관의 세부사항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네팔과 말레이시아의 면담 장소는 모두 북한대사관과 인접한 곳이었다. 안보리 패널의 조사에 따르면, 오학철은 쿠바와 페루, 예멘 주재 북한대사관에도 배치돼 일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북한과 대량으로 무기를 거래한 사실이 적발됐거나, 거래했을 것이라고 의심받는 국가다. 이들 거래에서 오학철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말레이시아의 한 음식점에서 다시 만난 자리, 오학철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아제르바이잔 측이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 10대를 먼저 샘플로 받아 자기 나라 안에서 시험평가를 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기 때문이었다. 오학철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며 선을 그었다. 70대 이상 구매를 결정한 후에, 그것도 북한 내에서만 시험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북한의 무기 수출 운송 루트는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 외국과 직접 연결된 항공편이나 정기선박 노선 수가 적은 데다, 경제제재로 주요 공항이나 무역항을 사용하기 까다로워진 점도 거래를 어렵게 만들었다. 바닷길을 이용할 때는 동아시아 인접국가로 일단 물건을 나른 뒤, 다시 피더선이라 부르는 중소형 컨테이너 선박에 옮겨 대형 항만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게 북측 설명이었다. 운송비가 비쌀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팔겠다는 사람이 있고 사겠다는 사람이 있지만, 물건을 옮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레인저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북측은 홍콩이나 타이완 가오슝 같은 가까운 항구에서 물건을 옮겨 실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웠다. 고민에 빠진 레인저는 베트남 국적인 자신의 여자친구 티킴리엔후잉을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그의 이름으로 ‘홍콩커머셜’이라는 차명회사를 만들어 홍콩 세관에 등록한 후 환적을 담당케 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된다.
한 번 거래에 2억~3억 달러의 ‘빅 샷’
불법 무기거래를 담당하는 것으로 확인된 북한 혜성무역 소속 오학철의 여권. 남미와 중동의 북한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한 기록이 남아 있다. 2004년까지 그가 사용한 여권은 고위간부에게만 발행되는 것이었다.
특히 오학철이 “기당 1억 달러”라는 엄청난 가격을 제시한 중거리 미사일은 레인저로서도 자못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북측은 한 번에 3기 이상만 판매 가능하다는 묘한 조건도 붙였다. 중거리 미사일 2기에 단거리 미사일 1기를 묶거나 그 반대 조합만 가능하다는 설명. 계산은 무조건 달러화가 아닌 유로화여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최소한 한번 거래에 2억~3억 달러가 오가는 ‘빅 샷(big shot)’이었다.
레인저의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팔 수만 있다면 말 그대로 ‘무기 암시장의 큰손’으로 거듭날 수 있지만, 수천km급 대량살상무기를 중개한다는 것은 전 세계 모든 나라 정보당국의 타깃이 되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수수료 수천만 달러만 생각해 냉큼 받을 수 있는 카드가 아니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스커드B, C 등 사거리가 수백km인 단거리 미사일 부품을 이란이나 시리아, 아랍에미리트 등 다양한 국가에 수출해왔다. 이를 조립한 미사일은 해당 국가에서 실전에 배치된 후 뛰어난 성능을 과시해 ‘대량살상무기 수출 국가 북한’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3500km급 중거리 미사일의 해외 거래 사실은 이제까지 알려진 바 없다. 이러한 제안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도 레인저 사건이 처음이다.
그간 북측이 공개한 무기체계 가운데 이 정도 사거리가 가능한 물건은 무수단 미사일과 KN-08 정도뿐이다. 그러나 시험발사를 거치지 않은 이들 미사일이 과연 신뢰할 만한 성능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 사이에서도 회의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7월 27일 ‘전승절’ 열병식에 등장한 무수단 미사일이 모형일 개연성이 높다는 미 NBC 방송의 최근 보도가 대표적이다.
유엔 안보리 보고서를 처음 보도한 미국의 북한 전문 인터넷매체 ‘NK뉴스’는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의 마크 피츠패트릭 핵비확·군축 연구팀장의 말을 인용해 “혜성무역 측이 무기상의 반응을 떠보고자 미사일 기술력과 가격 등을 과장했을 공산이 크다”고 보도한 바 있다. “북한이 국제사회로부터 각종 제재를 받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계약이 성사된다 해도 미사일을 운송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평가였다.
논의는 길어지고 성과는 없는 상황. 오학철에게 보낸 e메일에서 레인저는 아제르바이잔 측이 이 거래에 얼마나 의욕을 보이는지 끊임없이 과시해야 했다. 아제르바이잔 정부의 초청을 받아 당국자들과 면담했고, 그 과정에서 렉서스 리무진과 운전기사를 제공받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자랑이 이어졌다. 2010년 2월에는 대통령 직속의 고위관료 두 사람을 만나 아제르바이잔 비상계획청에 베레타 권총을 납품하라는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적어 보내기도 했다.
영국 검찰청 사기범죄국에서 불법 무기거래를 담당하는 엘스퍼스 프링글 검사는 ‘주간동아’에 보내온 관련 자료에서 “불법 거래를 은폐하려고 이 무렵 그가 사용한 e메일은 여자친구 명의로 설립한 ‘홍콩커머셜’ 계정이었다”고 말했다. 영국 검찰청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는 아예 관련 무역 허가를 받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불법임을 알았다는 유력한 방증이었다.
지난해 무기 수출액 3억 달러 추정
2011년 3월 런던 스탠스테드 공항. 레인저는 오랜 해외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를 맞은 것은 입국 사실을 미리 통보받은 영국 세관 요원들이었다. 신분을 확인한 세관 요원들은 출입국 심사대에서 그를 체포했고, 이내 검찰청으로 송치했다. 영국 사법당국이 그의 불법 무기거래 사실을 맨 처음 어떻게 확인했는지, 그 과정에서 e메일 감청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공개되지 않았다.
영국 검찰청은 중범죄를 심리하는 사우스워크 형사법원에 레인저를 기소했고, 1년 4개월간의 1심 재판 끝에 유죄 평결을 받았다. 올해 3월 그의 항소는 최종 기각됐다. 6월 유엔 대북제재 전문가 패널은 오학철과 혜성무역을 추가 제재 대상에 포함해 출입국과 국제 금융거래를 중단시켰다. 유엔 안보리는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한동안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중지했다가, 그의 항소가 최종 기각된 후 재개해 지금도 진행하고 있다.
재판정에서 그의 덜미를 잡은 것은 그렇듯 자랑으로 가득했던 e메일이었다. 레인저와 그의 변호사는 이 거래가 불법인 줄 몰랐다는 주장을 반복했지만, e메일에는 북한과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금수조치를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구가 여럿 포함돼 있었다. 위험을 강조해 더 많은 중개비를 타내려던 그의 노력이 거꾸로 함정이 된 셈이었다. 그가 e메일 주소를 만든 인터넷 포털사이트 야후는 법원에 이들 메시지를 증거로 제출했고, 그는 끝내 배심원들의 유죄 평결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한국 정보당국이 작성한 ‘2012년 북한 군사장비 수출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지난해 무기 수출액은 3억 달러가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일 정권 마지막 해인 2011년 수출액 2억5000만 달러보다 20% 넘게 늘어난 것. 문건은 “북한산 무기를 수입하는 국가는 중동, 아프리카, 동남아 등 10개국 수준이며 이란, 시리아, 미얀마와의 거래가 대다수를 차지한다”고 밝혔다(‘신동아’ 2013년 2월호 관련 기사 참조). 정부 소식통은 “북한에서 무기를 수입하는 나라를 살펴보면 국제사회로부터 무기거래를 제한받는 국가, 옛 소련제 노후 무기를 보유해 ‘애프터서비스’를 못 받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국제사회는 유엔 제재 등을 근거로 무기거래를 감시하지만, 불량국가 간 무기거래는 계속 증가한다”고 말했다.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3년 9월 3일자 90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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