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세종청사 내 구름다리에서 바라본 기획재정부 청사. 도로를 기준으로 왼쪽은 기재부, 오른쪽은 세종청사관리소가 입주해 있다. 기재부는 과천청사에서는 ‘상석(上席)’격인 1동을 차지했던 것과 달리 세종청사에서는 1동 자리를 국무조정실에 내주고 4동에 자리 잡고 있다. 세종=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그는 7월 들어 사무실보다 기재부로 출근하는 날이 더 많았다. 자기 부처의 세제지원 정책이 이번 개정안에 반영되게 해달라고 거의 매일같이 세종시에 와서 ‘로비 전쟁’을 벌인 것이다. 불볕더위에 몸은 파김치가 됐지만 기재부의 담당 공무원을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B 과장은 “우리가 가겠다고 전화를 하면 오지 말라는 답변만 듣기 때문에 항상 불시에 찾아가야 한다”며 “결국 허탕만 치고 몇 시간이 걸려 사무실로 돌아가는 날이 부지기수”라고 말했다.
전체 정부 부처 가운데 행정고시 성적이 가장 우수한 공무원들이 모인 조직, 한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막강 파워’를 가진 최고의 엘리트 관료집단….
위상이 화려한 만큼 기재부를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많다. 우선 ‘예산’과 ‘세제’라는 절대적인 정책 수단을 갖고 다른 부처들에 ‘슈퍼갑(甲)’ 행세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또 철저한 상명하복과 끈끈한 관계로 ‘끼리끼리’ 똘똘 뭉쳐 금융계 등의 요직을 싹쓸이한다는 비난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국회의원은 4년, 대통령은 5년, 관료는 30년’이란 말이 있다. 정권의 손 바뀜에 유연하게 적응해가면서 자신들의 필요성을 부각시켜 수명을 연장해가는 관료들의 무한권력을 풍자한 말이다. 동아일보는 한국 사회의 엘리트집단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기재부의 ‘실체’를 들여다보기 위해 행정부처의 전·현직 고위관료 30여 명을 심층 인터뷰하고 기재부 직원 11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 “같은 과장급인데 안만나줘… 하급자 거쳐오라는거죠” ▼
‘공무원 위의 공무원’
다음 연도 세제개편안과 예산안이 결정되는 여름철만 되면 기재부의 담당 직원들은 사실상 ‘공무원 위의 공무원’이 된다. 각 부처와 지자체 공무원들은 저마다 세제개편안이나 예산안에 반영해야 하는 정책 관련 자료와 선물보따리를 잔뜩 싸들고 기재부 세종청사로 몰려온다. ‘기재부를 설득해 반드시 관철하라’는 상사의 특명을 받은 터라 부담은 가중된다. 예산을 따내지 못하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지자체 군수 시장은 물론이고 평소에 기재부 장차관을 대놓고 혼내는 국회의원들도 이때만 되면 기재부에 아쉬운 소리를 하기는 마찬가지다. 기재부 예산실의 누구를 만나고 왔다며 지역 주민들에게 증거 사진을 내밀고 홍보하는 풍경도 매년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기재부는 스스로 “예전보다 권한이 많이 약화됐다”고 하지만 기재부 관료들을 자주, 가까이서 접하는 많은 사람이 기재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큰 변화가 없다.
사회부처의 한 과장급 공무원은 “예산철에는 기재부만 찾아가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그냥 복도에서 기다린다. 그러면 사무관이나 주무관이 5분 정도 만나준다”며 “우리 부처에서 국장이 가도 기재부는 사무관이 응대할 때가 있는데 배석하는 입장에서 무척 민망하다”고 털어놨다. 또 그는 “사무관이 아닌 서기관급과 만나려면 고교 또는 대학 동문인 직원을 보내거나 연줄 있는 민간인을 동원해 같이 가기도 한다”며 “예산 달라고 하면 관련 자료는 무더기로 요구해놓고 막상 찾아가 보면 서류는 들춰보지도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고 덧붙였다.
경제 선임부처로서 정책 조정을 하는 과정에서도 기재부의 ‘갑 행세’에 대한 다른 부처의 불만은 끝없이 이어진다. 경제부처의 한 국장은 “예고도 없이 회의를 소집한다고 하고, 협의도 없이 장관회의에 자기들이 원하는 안건을 올려버리는 등 전횡이 많다”며 “직원들의 식견이나 수준은 확실히 높다는 건 인정하겠는데, 다른 부처의 사정도 어느 정도 봐주면서 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금융계의 ‘영원한 갑(甲)’
잘나가는 선후배들끼리 인연을 과시하며 형성한 이들의 ‘이너서클’은 ‘모피아’(재무부의 영문표기 이니셜인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라는 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의 ‘끌어주고 밀어주는’ 독특한 단결력은 실제로 역대 금융계 인사를 기재부 출신이 좌지우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재부의 전현직 관료 모임에서 선배들은 후배들을 위해 ‘격려금’을 내고 후배들은 선배들을 금융회사나 산하기관의 기관장으로 모시는 관례가 되풀이되는 것이다.
기재부와 금융위 모피아가 정부 지분이 하나도 없는 민간 금융회사의 인사권을 사실상 틀어쥐고 있다는 건 이제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수년 전 증권업무를 총괄하는 과장은 금융계에서 ‘여의도(증권회사들이 몰려 있는 곳)의 황제’라고 불리기도 했다. 민간 금융회사의 최고경영자(CEO)조차 금융위의 주무 과장이나 실무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 적지 않다.
현 정부도 모피아의 이런 ‘금융계 자리 독식’을 막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미 금융계의 요직 대부분은 관료 출신들이 장악한 상태다.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 임종룡 NH농협금융지주 회장, 김근수 여신금융협회 회장, 이원태 수협은행장 등은 모두 기재부 금융국이나 세제실 등에서 잔뼈가 굵은 관료들이다. 이런 막강한 관료들을 제치고 국책금융기관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민간(교수) 출신으로 선임된 홍기택 산은금융지주 회장에 대해서도 “그 자리를 노리는 모피아들의 견제로 재임 기간 내내 고전할 것”이라는 촌평이 나올 정도다.
직원들 “그래도 우린 옛날 같지 않아”
기재부 직원들은 이런 외부의 시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취재팀은 대변인실의 도움을 받아 세종청사에서 일하는 기재부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기재부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에 찬반을 묻고 기재부 직원들의 강점과 약점을 고르게 하는 내용이었다. 이 설문에서 직원들은 ‘기재부는 관료사회에서 엘리트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에 전체 111명 중 101명(91.0%)이 ‘그렇다’고 답했다. 또 ‘연대의식과 위계질서가 투철하다’(61.3%), ‘다시 공무원 생활을 해도 기재부에서 하겠다’(73.9%)는 답변도 과반수를 차지했다.
자신이 다른 부처에 대해 갑(甲)이라고 느끼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38.7%만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경제정책의 주도권이 국회로 넘어갔다’(64.9%), ‘다른 부처에 대한 장악력이 약해졌다’(88.3%)고 생각하는 경향이 컸다. 설문 결과는 결국 “기재부 직원들은 스스로를 여전히 유능하고 엘리트라 여기지만 자신들의 권력이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재부의 국장급 공무원은 “1980, 90년대만 해도 거의 모든 부처를 경제기획원이 사실상 ‘장악’하고 있었다”며 “다 옛날 정부의 힘이 막강했던 권위주의 시절 얘기”라고 말했다.
기재부의 베테랑 관료들은 이를 두고 “시대가 변함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사회가 제도화되고 제도가 정교해질수록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조직은 결국 힘을 잃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정치환경의 변화가 큰 역할을 했다. 경제기획원이 독주하던 1980년대에는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 국회의 역할이 거의 미미했다. 정부와 여당, 즉 당정이 의기투합만 하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법개정 사항은 물론이고 작은 시행령 하나를 고치려고 해도 장차관이 국회에 가서 열심히 설명하고 다녀야 한다. 기재부의 한 고위공무원은 “요즘에는 후배들에게 새로운 대책을 내놓을 때는 가급적 국회에 안 가고 시행할 수 있는 것부터 먼저 찾으라고 지시한다”며 “가령 3분기(7∼9월) 경제를 살려야겠다며 대책을 발표하면 정작 국회에서 아무리 통과가 잘 돼도 실제 시행은 내년 봄부터다. 그러면 그건 올해 3분기 대책이 아니라 내년 2분기(4∼6월) 대책이 된다”고 푸념했다.
기재부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많이 약해졌다고 보는 사람들은 단적인 예로 이번 세제개편안 사태를 든다. 기재부에서 약 10년을 몸담았다가 다른 경제부처로 간 한 고위관료는 “기재부의 그 많은 관료가 몇 달 동안 공들여 만들어온 게 정치권의 입김으로, 대통령의 한마디로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았느냐”며 “이는 정책의 주도권이 빠르게 정부에서 정치권으로 넘어가는 것을 입증하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관료 개개인의 파워나 무게감도 과거에 비해서는 많이 위축됐다. 옛날에는 ‘재무부 국장’ 하면 업무권한은 물론이고 사회적 지위를 봐서도 그 ‘끗발’이 상당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강했다. 특히 모피아 파워의 상징이었던 이재국(현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의 웬만한 관료들은 고참 사무관급만 돼도 정치권이나 재계에 상당한 연줄과 배경을 갖고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기재부의 한 과장은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기재부 국장이 TV토론회 같은 데에 나가면 금융회사 임원이나 민간전문가 등 상대방은 너무 떨려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기재부에서 간부 공무원들은 화려한 접대문화나 든든한 스폰서와는 거리가 멀다. 퇴직 후 산하기관을 “두 텀(term), 세 텀 씩 돈다”는 말도 산업통상자원부나 국토교통부 같은 곳의 얘기일 뿐 기재부는 그다지 해당사항이 없다. ‘관료생활의 꽃’이라는 본부 국장 자리도 한 번 하면 다행, 두 번 이상 하면 대단한 관운(官運)이란 평가를 받을 만큼 인사도 빡빡해졌다. 세종시로 청사가 이전하면서 직원들끼리 뭉치는 끈끈한 회식문화는 많이 사라졌다.
▼ “정책 생산 기술자? 정권에 ‘NO’ 할 수 있는 부처” ▼
정권에 맞설 수 있는 행정부 최후의 보루
30일 정부세종청사에 있는 기획재정부 부동산정책팀의 사무실 풍경. 최근 전·월세난 대책, 취득세 인하 등 여러 부처에 걸쳐 있는 정책들이 이곳의 ‘조정’ 과정을 거쳐 나왔다. 이처럼 다른 부처가 국·실 단위에서 다루는 굵직한 정책들도 정책조정 기능이 있는 기재부에서는 과(課)나 팀 등 상대적으로 작은 조직에서 처리된다. 세종=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2004년 7월 이 전 부총리는 경제정책 기조를 두고 사사건건 대립하던 노무현 정부의 탄생 주역 386세대에 “386세대가 경제하는 마음을 배우지 못 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자택에서 가진 본보와의 심야 인터뷰에서였다. 그는 “대한민국이 시장경제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며 청와대와 여권의 각종 ‘개혁정책’에 대한 쓴소리를 쏟아냈다. 당시 노 정부의 분배적 정책기조와 달리 ‘성장’과 ‘시장경제’라는 신념을 지키던 이 전 부총리는 아파트 원가 공개, 공직자 주식백지신탁제도 문제 등을 둘러싸고 386세대와 극한 대립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직(職)’을 건 이날 발언을 계기로 그는 오히려 대통령의 신임을 얻고 각종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가져왔다.
기재부는 정권의 부당한 요구나 정치권의 무리한 포퓰리즘에 맞설 수 있는 행정부 내 ‘최후의 보루’라는 인식이 강했다. 특히 경제에 부작용이 있는 정책에 대해 기재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단호히 ‘노(NO)’라고 하는 모습은 다른 부처 장관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기재부 장차관들이 마치 전통처럼 후배들에게 주문하는 정신자세이기도 하다. 윤증현 전 장관은 후배들에게 “무상(無償)이라는 주술(呪術)에 맞서다 보면 기재부가 사방에서 고립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립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박재완 전 장관도 지난해 외신으로부터 ‘포퓰리즘에 맞설 배짱을 가진 용기있는 관료’라는 찬사를 들었다. 기재부의 과장급 공무원은 “우리가 정권 입맛에 따라 정책을 생산해내는 기술자라는 욕을 많이 먹지만 노무현 정부의 시장친화적인 정책들은 모두 경제관료들의 설득과 고민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정부 내 선임부처로서 기재부의 위상은 관료들의 면면이나 조직문화에서부터 큰 차이가 난다. 기재부에서 20년 안팎을 일한 한 과장은 “공무원생활 내내 선배들의 칭찬을 받아본 경험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는 “하도 인재가 많다 보니 조직 분위기가 ‘여기 있는 사람들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뭐든지 다 잘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다”며 “보고서 작성이나 토론,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축구, 술자리까지 어느 하나라도 못 하는 게 있으면 직원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문화”라고 말했다.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서로 경쟁하다 보니 조직원들 사이에서는 ‘나는 최고의 동료들과 함께 일한다’는 자부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국가 전체를 가장 높은 시각에서 바라보다 보니 중립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도 기재부 공무원만의 강점이다. 가령 보건복지부는 노인·장애인, 농림축산식품부는 농민, 산업통상자원부는 기업이라는 각각의 ‘정책 고객들’이 있지만 기재부는 그런 이해관계자가 없다. 굳이 찾자면 전체 국민 또는 공무원들이 기재부의 고객이다. 따라서 특정 이익집단에 ‘포획’되지 않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상당히 자유롭다.
기재부의 한 고위공무원은 “다른 건 몰라도 기재부 직원들은 지적인 수준이 떨어진다는 얘기 듣는 걸 가장 싫어한다”며 “일 못 한다는 평가에 무척 자존심 상해하고 자기 지식을 뽐내고 깊이 있게 토론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특징”이라고 말했다.
다가오는 위기와 도전
기획재정부 세종청사 3층 예산실을 밖에서 바라본 모습. 다음 달 새해 예산안 발표를 앞두고 기재부에서 아주 바쁜 부서 가운데 하나다. 기재부는 예산실 내부의 사진촬영을 불허했다. 세종=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기재부의 한 1급 공무원은 사석에서 “조직의 활기가 예전 같지 않다”며 이런 얘기를 꺼냈다. 전국에서 최고의 두뇌가 모인다는 기재부에서 경쟁이 시들해졌다니, 이는 무슨 뜻일까.
“20, 30년 전에는 한 기수에 공채 사무관 서너 명만 기재부로 왔는데 이제는 많으면 30명씩 들어옵니다. 이들 중에 결국 한두 명만 장차관 되고 출세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수십 분의 1의 확률을 걸고 인생 무리하기보다는 그냥 적당히 소시민처럼 사는 쪽을 택하게 되는 것이죠.”
이 같은 현상을 두고 기재부의 한 과장은 “기재부가 ‘인재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들어올 때는 아주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왔는데 아무리 똑똑하게 일을 잘해도 막상 위로 갈수록 버틸 수 있는 자리는 한정돼 있다는 것이다.
기재부의 이런 극심한 피라미드 구조는 산하기관이 많고 공채 사무관의 수도 비교적 적은 다른 부처들에 비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2008년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가 합쳐진 뒤 고위공무원 자리 자체가 줄어 인재들이 도태되는 현상은 더 심해졌다.
기재부에서 쉽게 전문성을 키우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다른 경제부처의 한 고위 간부는 “기재부는 모든 분야를 다 할 줄 아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를 키우는 기관이다. 이는 나중에 장차관을 하기 위한 기능인데, 만약 장차관이 되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최근에는 기재부보다 공정거래위원회나 금융위원회, 국세청을 선호하는 고시생도 부쩍 늘었다. 또 기재부 내에서도 세제실이나 국제금융정책국처럼 별도의 전문성을 쌓을 수 있는 부서가 인기를 끌고 예산실처럼 ‘고생만 많고 실속은 없는’ 부서는 꺼리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기재부의 한 과장급 공무원은 “옛날에는 우리가 다른 부처 보고서까지 대신 써줬지만 이제는 정부정책이 세밀해져서 기재부의 입김이 상당히 약해졌다”며 “해당 분야의 전문성에 있어서는 워낙 게임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가장 힘 있고 명예롭다는 평가를 받던 기재부가 어떻게 이런 ‘존재의 위기’에 빠져들게 됐을까. 또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기재부 안팎의 많은 관료는 이제 기재부가 경제 총괄부처로서 새로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기재부의 한 국장급 공무원은 “세제개편안 사태를 거치면서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 이제 머리로만 일하던 시절은 지났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정책도 과거처럼 우리만 옳다고 생각해서 밀어붙이기보다는 세상과 같이 호흡하고 소통하는 게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며 “이번에도 사전에 충실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으면 사태가 이 정도까지 커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다들 반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처럼 기재부가 안팎으로 혼란스럽고 뉴스의 중심에 서는 때일수록 선임부처로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한국은행의 한 팀장급 관료는 “정치적으로 너무 윗선의 입맛을 맞추려 하다 보면 정책을 그르칠 수 있다”며 “항상 국가경제를 위한다는 초심, 원래 가진 훌륭한 정신과 의지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기재부가 현재 직면한 위기를 딛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결국 젊은 직원들의 몫으로 남아 있다.
“국가정책이란 게 결국 누군가가 판단을 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일 아닌가요. 그게 공무원의 숙명인 것 같아요. 저도 그런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 내 일에 국가경제의 사활이 달려 있다는 그런 사명감….”
최근 행시 수석으로 기재부에 들어온 한 20대 여사무관의 다짐이다.
세종=유재동·박재명·송충현 기자 jarrett@donga.com
▼환란 주범서 소방수로… “모피아 시대는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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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월 18일 오전 10시, 국회 본관 501호실. 10년 전 ‘5공 청문회’가 열렸던 이곳에 이규성 재정경제부 장관을 비롯한 재경부 주요 간부들이 들어섰다. 외환위기 원인 규명을 위한 경제청문회에 출석하기 위해서다. 의원들의 질타가 이어지자 이 장관은 결국 고개를 숙이며 재경부의 책임을 인정했다.
외환위기는 한국 경제의 ‘절대 갑(甲)’으로 군림하던 ‘모피아’가 맞은 최대 위기였다. 금융정책과 금융감독 권한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던 모피아에 ‘외환위기의 주범’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모피아를 청산하려는 움직임도 이어졌다. 금융과 예산, 세제를 총괄하던 부총리급 재경원을 장관급 재경부로 격하시키고 관치(官治)금융의 핵심으로 떠오른 금융정책실을 국제금융국과 금융정책국으로 쪼갰다. 외환위기 당시 금융정책을 담당했던 주요 간부들은 산하 기관이나 해외 국제기구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쉽게 수그러들 것 같지 않던 모피아의 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잠시 숨을 죽였던 모피아는 외환위기의 충격파가 가라앉기도 전에 기업 구조조정의 칼자루를 쥐면서 ‘한국 경제의 소방수’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모피아를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부 경제팀의 요직은 돌고 돌아 결국 모피아의 차지가 되는 현상이 반복됐다. 금융공기업과 금융 관련 협회, 민간은행 수장 역시 모피아로 분류되는 경제 관료들이 꿰찼다.
경제성장기에 태동한 관료 파워의 핵 ‘모피아’
1982년 3월 31일 서울 중구 회현동 무역회관에서는 재무부 출신 전직 관료들의 친목모임인 ‘재우회(財友會)’ 발족식이 열렸다. 이날 발족식에는 남덕우 전 재무부 장관을 비롯한 전직 장관들, 시중은행장, 금융공기업 사장 등 금융계를 좌지우지하던 180여 명의 재무부 출신 인사들이 참석했다. 197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관치금융을 통해 경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모피아 시대를 공식화하는 신호탄이었다.
정부 수립 초기 경제 권력은 재무부와 경제기획원(당시 기획처), 한국은행이 나눠 갖고 경쟁했다. 예산과 기획은 기획처, 금융과 세제는 재무부, 외환정책과 금융감독권은 한은이 쥐는 식이었다. 1960년대 들어 재무부가 한은의 권한 상당 부분을 가져왔지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주도한 경제기획원을 넘어서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가 커지기 시작한 1970년대 들어 금융과 세제, 당근과 채찍을 모두 쥐고 있던 재무부로 경제 권력의 균형추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모피아가 맞은 첫 전성시대를 대표하는 1세대 인물들은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과 장덕진 전 농수산부 장관이다. 김 전 장관은 1966년 재무부 이재국장을 거쳐 차관보, 차관 등 승진가도를 달렸고, 장 전 장관은 이재국장, 차관보, 경제기획원 차관 등을 뒤이어 역임했다.
특히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임을 업은 김용환 재무부 장관 취임 이후 재무부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김 전 장관은 취임 직후 한은 은행감독원에 대기업 대출 규제를 총괄하는 여신관리국을 신설하고 재무부 이재국 출신을 국장에 앉혔다. 재무부가 은행감독원을 통해 금융권과 대기업의 자금줄을 틀어쥐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70년대 중반부터 재무부 출신들이 민간 금융회사를 장악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예전 모피아의 권력을 묘사하던 ‘재무부 10년, 은행 10년, 제2금융권 10년’, ‘재무부 관료의 정년은 70세’라는 속설이 등장한 것도 이때다.
실제로 1975년 재무부 차관보에서 물러난 한 관료는 이후 주택은행장, 경남은행장, 중앙투자금융 사장, 한국투자신탁 사장을 거쳐 전국투자금융협회장을 지낸 뒤 재무부를 떠난 지 18년 만인 1993년에야 금융권 요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금융공기업 사장을 지낸 한 인사는 “용퇴하는 선배에게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당시에는 재무부 인사계가 공공연하게 퇴직 관료들을 관리했다”며 “1980년대 말에는 은행이나 증권 관련 기관장 중 재무부 출신이 아닌 사람은 두어 명에 불과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외환위기 구원투수로 화려한 부활
한 기획재정부 출신 인사는 “원래 흔히 경제 부처를 총괄하는 경제기획원 관료는 ‘어너러블(honorable)’, 실권을 가진 재무부 관료는 ‘파워풀(powerful)’하다고 평가했는데 경제 3권(예산, 세제, 금융)이 합쳐진 재경원은 명예와 힘을 모두 갖게 된 셈”이라고 말했다.
‘공룡 부처’로 절대 경제 권력을 쥔 모피아는 1997년 말 외환위기를 맞으며 큰 타격을 입었다. 재경원은 ‘외환위기의 주범’이라는 손가락질 속에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로 분리됐다. ‘이번 기회에 모피아 독주 체제를 반드시 청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모피아의 아성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외환위기는 오히려 모피아가 제2의 전성시대를 맞는 계기가 됐다. 대체 세력을 찾지 못한 김대중 정부가 관치금융의 폐해를 막기 위해 설치한 금융감독위원회의 주도권을 결국 모피아에 넘겨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2세대 모피아를 대표하는 인물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다. 1974년 재무부 금융정책과장을 맡으면서 김용환 전 장관의 방을 수시로 들락거려 ‘부(副)장관’으로 불렸던 이 전 부총리는 1998년 금감위원장을 맡아 금융 구조조정과 부실 기업 정리를 주도했다. 이 전 부총리가 모피아의 중심으로 등장한 데도 김 전 장관의 역할이 컸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김 전 장관은 조세연구원(현 조세재정연구원) 자문위원으로 나가 있던 이 전 부총리를 외환위기 극복의 소방수로 불러들였다.
금융·대기업 개혁의 칼을 쥐고 은행 합병, 대우그룹 해체 등을 주도한 이 전 부총리는 구조조정 실무 업무를 민간 전문가들과 함께 재경부의 전신인 재무부 금융정책국 출신들에게 맡겼다. 이때 이 전 부총리의 부름을 받은 인물들 가운데 재경원 금융정책국장 출신으로 나란히 금감위 부위원장, 증권선물위원장, 산업은행 총재를 지낸 정건용 나이스(NICE)그룹 금융부문 회장과 유지창 유진투자증권 회장, 그리고 재경부 금융정책국장과 금융정보분석원장을 지낸 뒤 민간으로 나간 변양호 보고펀드 대표 등이 있다. 이른바 ‘이헌재 사단’의 핵심들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에는 외환위기 당시 재경원 차관을 지내다 외환위기로 밀려났던 강만수(이명박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 지냄), 외환위기 때 재경원 금융정책실장으로 금융정책을 총괄했던 윤증현(기재부 장관), 강력한 외환정책으로 국제금융시장의 투기세력을 벌벌 떨게 만들던 최중경(지식경제부 장관),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재경부 차관을 지낸 뒤 민간으로 떠나 있던 김석동(금융위원장) 등이 대거 복귀하며 다시 모피아의 전성기를 꽃피웠다.
정치권-대기업에도 포진
모피아가 한국 경제 주도 세력의 위치를 확고히 한 1980년대부터 모피아를 권력의 정점에서 끌어내리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졌다. 그때마다 모피아의 대항마로 등장했던 대표적인 세력이 경제기획원 출신 관료들이다.
예산과 경제정책 기획이 특기인 경제기획원은 박정희 정부 때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같은 비전 제시에는 뛰어나지만 끈끈한 조직문화는 모피아에 비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획예산처 출신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모피아는 ‘팀워크’를 중시하는 축구, 경제기획원은 개인 역량이 중요한 야구를 주로 즐긴 것을 봐도 두 집단의 조직문화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 관가에서는 “경제기획원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초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현오석 전 한국개발연구원장,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 조원동 전 조세연구원장 등 경제기획원 출신들이 임명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민간 금융회사와 금융 관련 협회, 금융공기업 수장 자리를 모피아로 분류되는 전직 관료들이 차지하면서 “모피아의 시대는 지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과거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대 대통령들은 집권 초기 모피아를 멀리하려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모피아를 다시 찾았다. 모피아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은 그 이유로 끈끈한 선후배 관계에 따른 ‘인의 장막’을 들지만 모피아 내부에서는 현실감각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한 탁월한 위기 대응 능력을 꼽는다.
한 기재부 간부는 “‘경제기획원이 하늘을 볼 때 모피아는 땅을 살핀다’는 말이 있다”며 “경제위기 조짐이 나타날 때 풍부한 정책 경험과 순발력 있는 정책 생산 능력을 가진 쪽이 부각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든든한 인적 네트워크와 강한 추진력을 갖춘 모피아는 정치권이나 대기업에도 적지 않게 진출해 있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김진표 이용섭 민주당 의원 등이 대표적인 재무부 출신 정치인이다. 이현승 SK증권 사장, 방영민 삼성증권 부사장 등은 각각 서기관, 과장 시절 관직을 떠나 대기업 금융계열사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 1998년 재경부 공보관을 지낸 뒤 부실 기업이었던 코리안리 사장으로 취임해 5차례에 걸쳐 재임에 성공하며 회사를 세계적인 재보험사로 끌어올린 박종원 코리안리 고문 역시 실적으로 ‘낙하산’이라는 딱지를 떼어낸 모피아 출신으로 꼽힌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