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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호의 경제 프리즘]전세의 안락사를 許하라

입력 | 2013-09-03 03:00:00


허승호 논설위원

부친은 1968년 경남 창원에서 부산으로 전근 오면서 처음으로 전세방을 얻었다. 1958년 결혼해 10년간 남의 집 방을 빌려 살았지만 따로 돈을 내지는 않았다. 경남의 오지를 돌며 교사 생활을 하던 부친이 새 임지에 오면 마을 유지들이 의논해 방을 마련해주곤 했던 것이다. 당시 도회지에서 방을 빌릴 때도 전세보다는 ‘보증금+사글세’가 일반적이었다. 전세가 흔해진 것은 산업화와 함께 이농(離農)인구가 대거 도시로 밀려든 1970년대다. 하지만 이때도 거의 셋방이었고 셋집은 드물었다.

전셋집이 확산된 것은 1980년대 중후반이다. 신혼부부들이 전세방보다는 소형 아파트 전세를 선호해 수요가 크게 늘었다. 공급 측면에서는 전세를 끼고 아파트를 산 후 집값 오르기를 기다리는 계층이 형성됐다. 집값 오름세가 고착되고 중산층이 여유자금을 손에 쥐면서 생겨난 새 풍속도다. 전세는 부족한 투자자금 조달의 유용한 수단이기도 했다.

매매가의 60∼70%이던 전세가가 최근 80∼90%로 올랐다고 아우성이다. 전셋값 상승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집값 상승 기대가 꺾이자 무리를 해서라도 내 집을 사려는 매입 수요가 줄고 자가(自家)보다 거주비용이 싼 전세로 수요가 옮겨갔다. 둘째, 저금리가 지속되자 전셋집 주인이 같은 수입을 올리려면 세를 올리거나 월세로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요즘 월세 전환 이율은 연 6∼10%나 된다. 전셋집이 월세로 바뀌면서 공급이 줄었다. 이처럼 전세 수요는 느는데 공급이 줄면? 가격이 오른다.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전제할 게 있다. 매매가가 전세가보다 비싼 유일한 이유는 집값 상승 기대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앞으로 집값이 안 오른다면 세입자로서는 설혹 전세금이 집값에 근접해도 집 수리비가 안 들고, 재산세를 안 내며, 집값 변동 위험도 회피할 수 있으므로 전세 쪽을 선호하게 마련이다. 전세가의 매매가 근접을 자연스러운 시장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이론적으로 표현하면 ‘매매가와 전세가의 차액=집값 상승 기대수익을 현재 가치로 할인한 가액’이다)

정책의 제1원칙은 국민 주거 안정이다. 집값에는 아직 거품이 많이 끼어 있다. 집값을 더 올려 전세와 격차를 벌리는 방식은 절대 안 된다. 가계부채를 부추겨서도 안 된다. 하지만 8·28대책은 전세 수요자를 집 사게 만드는 데 거의 ‘올인’하고 있다. 당장의 전세 수요를 줄이는 효과는 있겠지만 집값 상승을 부추기는 패착이다. 집 살 돈을 듬뿍 빌려주는 건 가계부채를 부풀리며 ‘하우스 푸어’를 양산한다. 전세자금 대출도 전세가를 끌어올리며 가계부채를 늘린다. 단기충격 해소에 골몰하다 보니 정책목표가 뒤죽박죽이 돼버렸다. 이런 정책 조합을 정부는 ‘주택시장 정상화’라 작명했다. 놀랍다.

물론 집값 거품을 갑자기 꺼뜨리면 금융부실로 인한 위기를 부른다. 서서히 사그라지도록 해야 한다. 사실 어느 정권에서나 부동산 정책의 기조는 ‘조용한 거품 제거’였다. 그러나 경기침체로 민심이 뒤숭숭하면 슬그머니 부동산에 거품을 주입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했다. 4·1대책이나 이번 8·28대책에 오래전부터 보아온 거품 주입과 닮은 점이 많아 걱정이다.

별도의 장기 정책 구상이 필요하다. 월세 전환 세입자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월세 지출에 대한 소득공제를 더 해줘야 한다. 임대주택 공급 확대의 성패는 결국 민간 시장이 활성화하느냐에 달려있다. 다주택자에게 부담이 아니라 혜택 주기, 임대법인 적극 육성 등 재력가를 임대시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인센티브에 훨씬 더 과감해야 한다.

전세는 외국에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제도다. 전셋집은 ‘집값 거품 시대의 사생아’일 뿐 지켜야 할 소중한 전통과는 거리가 멀다. 없어져야 할 운명이라면 그 방향으로 가되 ‘충격 없는 연착륙’을 유도하면 충분하다. 전세의 안락사를 허(許)하는 사회적, 정책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그게 해법이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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