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103>10월 26일 저녁
10·26 당시 만찬을 가졌던 궁정동 안가의 ‘그때 그 자리’. 동아일보DB
‘차 실장과 같이 입장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오는 차 안에서 나누던 이야기의 연속인 듯 김영삼 의원을 향한 불만과 부산사태에 대한 불쾌한 심정을 계속 피력했다. 대통령의 노(努)한 심기에 차 실장이 옆에서 가세해 만찬 초반 분위기는 실내의 조명처럼 어둡고 무겁게 시작되었다. 대통령이 마주보는 앞에 앉은 나는 화제를 오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로 초점을 맞추어 가급적 정치문제는 피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좀처럼 야당과 김영삼 의원에 대한 대통령의 비난은 수그러들지 않고 중앙정보부의 실책에 대해서도 연관하여 말씀을 하니, 차 실장은 내심 신이 난 것처럼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 첨언으로 질타를 더해 김 부장은 입장이 (점점) 난처해져갔다.’
다음은 김재규의 항소이유서에 있는 대목이다.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는데 박선호 중정 의전과장이 들어와 기척으로 김 부장에게 표시를 했다. 그러자 김 부장이 잠시 나갔다 다시 들어왔다. 다시 김 실장의 회고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김 부장이) “각하, 오늘 술시중을 들 여인들이 왔으니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하더니 여인들을 대통령의 양쪽에 앉게 했다. 한 여인은 “인기 가수”라며 심수봉을 가리켰고 다른 한 여인은 모 대학에 재학 중인 모델 지망생이라며 신재순 양을 소개했다. 각하의 권유로 심수봉 양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시작했다. 대통령은 평소에 술을 가리지는 않으나 경호실에서는 각하의 취향에 따라 최근에는 시바스리갈을 선호함으로 이날도 주전자에 시바스리갈과 물을 적절히 배합하여 드셨다. (대통령이) “김 부장이 술은 잘 마시지 못하면서도 술은 잘 만들거든”(했다). 술을 배합하는 것은 김 부장이, 대통령의 대작 상대는 나였다. 김 부장과 차 실장은 술을 거의 못했다. 잠시 화제는 여인들을 향하여 요즘 연예계 동향 등을 물으며 바꿔지는 듯하였으나 나누던 이야기가 조금 단절되면 대통령은 다시 정치문제로 돌렸다. “지금 정부가 이렇게 국민들을 보다 더 잘살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그 놈(YS)은 YH사건 그리고 부산 학생들을 선동해 가지고는 이 나라를 뒤엎을 궁리만 하고 있어.”’
대통령의 목소리는 조금 격앙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계를 보며 자주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7시 뉴스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날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소식이 궁금했던 것이었다.
“각하, 삽교천방조제 소식이 곧 나옵니다.”
‘대통령은 TV에 나오는 자신의 기념식 모습을 보며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우째, 저렇게 나를 못생기게 찍었노.” 좌중에 한바탕 웃음이 번졌다. 대통령이 상의를 벗자 우리도 함께 양복 상의를 벗었다. 뉴스 시청이 끝나고 몇 곡의 노래가 연주되는 도중에도 정치문제 이야기는 다시 나왔다.’
문제는 중앙정보부의 능력 부족이라는 등의 말이 대통령과 차 실장의 입에서 계속 나온 것. 김 실장도 “옆에서 듣는 김 부장은 유구무언 침묵으로 일관하여서 내가 민망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다시 그의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화제를 바꾸어보려고 가수 심수봉의 경력과 가요계 소식을 물어보고 박 대통령이 애창하는 ‘대지의 항구’를 (그녀에게) 부르게도 하였으나 노기에 찬 대통령의 심기는 여간해서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이 김 부장은 자신이 앉은 자리가 바늘방석인 듯 두서너 번 중정 직원들에게 무엇을 지시하는 것처럼 예전과 같이 방을 들락거렸다. 건강이 안 좋아 술을 삼가던 김 부장도 이날은 몇 순배 잔을 비웠다.’
방을 들락거린 김 부장은 밖에서 무얼 했을까. 10·26 사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발표는 이렇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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