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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총소리가 나면 너희는 경호원들을 처치하라”

입력 | 2013-09-03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103>10월 26일 저녁




10·26 당시 만찬을 가졌던 궁정동 안가의 ‘그때 그 자리’. 동아일보DB

79년 10월 26일 저녁 6시 5분. 궁정동 안가 구관으로 박 대통령이 도착했다. 대통령을 수행한 경호팀은 안가에 도착함과 동시에 경호업무를 중앙정보부에 넘기게 되어 있었다. 중정 사무관의 안내를 받아 차지철 실장과 함께 방으로 들어선 박 대통령을 김계원 비서실장과 김재규가 일어나 맞이했다. 실내는 반조명으로 좀 어두웠다. 상대방 얼굴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온돌방 중앙에 놓인 직사각형 식탁 한쪽에 대통령과 차 실장이 앉고 맞은 편에 김 실장과 김재규가 앉았다. 김 실장의 회고록을 인용한다.

‘차 실장과 같이 입장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오는 차 안에서 나누던 이야기의 연속인 듯 김영삼 의원을 향한 불만과 부산사태에 대한 불쾌한 심정을 계속 피력했다. 대통령의 노(努)한 심기에 차 실장이 옆에서 가세해 만찬 초반 분위기는 실내의 조명처럼 어둡고 무겁게 시작되었다. 대통령이 마주보는 앞에 앉은 나는 화제를 오늘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행사로 초점을 맞추어 가급적 정치문제는 피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좀처럼 야당과 김영삼 의원에 대한 대통령의 비난은 수그러들지 않고 중앙정보부의 실책에 대해서도 연관하여 말씀을 하니, 차 실장은 내심 신이 난 것처럼 대통령의 말씀을 받아 첨언으로 질타를 더해 김 부장은 입장이 (점점) 난처해져갔다.’

다음은 김재규의 항소이유서에 있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그날 저녁에도 “부산 사태는 신민당이 개입해서 하는 일인데 괜히들 놀라가지고 야단이야. 오늘 삽교천 행사에 가보았더니 대다수 국민들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부산 데모만 하더라도 식당 뽀이나 똘마니들이 많지 않아. 그놈들이 어떻게 국회의원의 사표를 선별 수리하느니 뭐니 알겠는가. 신민당에서 계획한 일인데도 괜히 개각이니 뭐니 국회의장을 사퇴시켜야 한다느니 하면서. 중앙정보부는 수고는 많이 하는 줄 알지만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겠어”라고 말할 정도로 피고인의 정보보고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는데 박선호 중정 의전과장이 들어와 기척으로 김 부장에게 표시를 했다. 그러자 김 부장이 잠시 나갔다 다시 들어왔다. 다시 김 실장의 회고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김 부장이) “각하, 오늘 술시중을 들 여인들이 왔으니 들어오게 하겠습니다” 하더니 여인들을 대통령의 양쪽에 앉게 했다. 한 여인은 “인기 가수”라며 심수봉을 가리켰고 다른 한 여인은 모 대학에 재학 중인 모델 지망생이라며 신재순 양을 소개했다. 각하의 권유로 심수봉 양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시작했다. 대통령은 평소에 술을 가리지는 않으나 경호실에서는 각하의 취향에 따라 최근에는 시바스리갈을 선호함으로 이날도 주전자에 시바스리갈과 물을 적절히 배합하여 드셨다. (대통령이) “김 부장이 술은 잘 마시지 못하면서도 술은 잘 만들거든”(했다). 술을 배합하는 것은 김 부장이, 대통령의 대작 상대는 나였다. 김 부장과 차 실장은 술을 거의 못했다. 잠시 화제는 여인들을 향하여 요즘 연예계 동향 등을 물으며 바꿔지는 듯하였으나 나누던 이야기가 조금 단절되면 대통령은 다시 정치문제로 돌렸다. “지금 정부가 이렇게 국민들을 보다 더 잘살게 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그 놈(YS)은 YH사건 그리고 부산 학생들을 선동해 가지고는 이 나라를 뒤엎을 궁리만 하고 있어.”’

대통령의 목소리는 조금 격앙됐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계를 보며 자주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7시 뉴스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날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 소식이 궁금했던 것이었다.

“각하, 삽교천방조제 소식이 곧 나옵니다.”

김 부장이 텔레비전을 가져와 틀었더니 뉴스가 시작됐다. 다시 김 실장의 회고다.

‘대통령은 TV에 나오는 자신의 기념식 모습을 보며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우째, 저렇게 나를 못생기게 찍었노.” 좌중에 한바탕 웃음이 번졌다. 대통령이 상의를 벗자 우리도 함께 양복 상의를 벗었다. 뉴스 시청이 끝나고 몇 곡의 노래가 연주되는 도중에도 정치문제 이야기는 다시 나왔다.’

문제는 중앙정보부의 능력 부족이라는 등의 말이 대통령과 차 실장의 입에서 계속 나온 것. 김 실장도 “옆에서 듣는 김 부장은 유구무언 침묵으로 일관하여서 내가 민망하기까지 했다”고 전한다. 다시 그의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화제를 바꾸어보려고 가수 심수봉의 경력과 가요계 소식을 물어보고 박 대통령이 애창하는 ‘대지의 항구’를 (그녀에게) 부르게도 하였으나 노기에 찬 대통령의 심기는 여간해서 가라앉지 않았다. 이 사이 김 부장은 자신이 앉은 자리가 바늘방석인 듯 두서너 번 중정 직원들에게 무엇을 지시하는 것처럼 예전과 같이 방을 들락거렸다. 건강이 안 좋아 술을 삼가던 김 부장도 이날은 몇 순배 잔을 비웠다.’

방을 들락거린 김 부장은 밖에서 무얼 했을까. 10·26 사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수사발표는 이렇다.

‘김재규는 7시 10분경 두 번째로 식당을 나와 별채인 본관으로 가서 이미 6시 35분경에 도착하여 식사 중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김정섭 차장보에게 “내가 각하와 식사 중이니 식사가 끝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동 건물 2층 집무실로 가서 보관하고 있던 서독제 웰터 7연발 32구경 권총 1정을 양복 하의 뒷주머니에 넣고 만찬 자리로 다시 돌아오면서 수행 중이던 의전과장 박선호와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에게 뒷주머니 권총을 꺼내 보이고 오른쪽 허리춤에 꽂으면서 “오늘 내가 해치우겠으니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을 처치하라. 각오가 되어있겠지” 하니 다소 주저하는 태도를 취하자 김재규는 “여기 참모총장과 2차장보도 와 있다”고 용기를 줌에 따라 박선호가 “각오되어 있습니다. 각하도 해치울 겁니까? 경호원이 7명이나 되는데요. 다음 기회로 미루는 것이 어떻습니까?” 되묻자 김재규는 “아니야, 오늘 하지 않으면 보안누설 때문에 안돼. 똑똑한 놈 3명만 골라 나를 지원하라, 다 해치운다” 하므로 박선호가 “그러면 30분만 더 여유를 주십시오” 말하자 “알겠다”면서 식당(만찬장)으로 다시 들어갔는데 이때 좌석은 부드러운 분위기로 전환되어 있었다. 7시 35분경 식당 주방장 남효주가 김재규에게 와 “과장님이 좀 뵙잡니다” 하자 김재규는 세 번째로 자리를 떠나 옆방으로 가서 박선호로부터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는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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