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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하태원]마지막 ‘비둘기’의 죽음

입력 | 2013-09-03 03:00:00


하태원 논설위원

미국의 대북정책특별대표 글린 데이비스와 사적(私的)으로 두 번 만난 적이 있다. 한 번은 서울, 한 번은 워싱턴이었는데 두 번 다 2012년 ‘윤달합의(2·29합의)’가 실패로 끝난 뒤였다. 북한은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장거리미사일 시험발사, 핵실험 유예의 대가로 24만 t의 영양 지원을 받기로 했지만 김일성 주석 100회 생일(4월 15일)을 맞아 ‘광명성 3호’를 쏘아 올리면서 합의를 깨버렸다.

베테랑 외교관인 데이비스는 로버트 갈루치(1994년 북-미 제네바협정), 크리스토퍼 힐(2005년 9·19합의)에 이어 ‘실패한 협상가’라는 멍에를 썼다. 하지만 그는 그런 평가보다 “순진(naive)했다”는 말을 듣는 게 더 불쾌한 듯했다. 상거래를 할 때 ‘같은 말(馬)’은 두 번 사지 않는 것이 서구사회 불문율인데 세 번째 같은 말을 사주고도 합의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뒤통수를 맞았으니 완전히 스타일을 구긴 것이다.

성품 좋아 보이는 데이비스지만 미국이 이른바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라는 정책기조 속에서 북한과의 대화에 소극적이었던 것 아니냐고 미국 책임론을 꺼내면 얼굴을 붉히곤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북한과의 대화를 원한다. 하지만 그 전에 북한이 ‘우리는 진지하다(serious)’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먼저 신뢰를 보여줄 책임이 북한에 있다.” 더이상 순진한 비둘기가 되기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데이비스의 눈에서는 박근혜 대통령보다 더 센 ‘레이저’가 나왔다.

필자보다 데이비스를 오래전부터, 더 많이 만나왔던 한 정부 당국자는 “내가 겪은 미국의 한반도팀 중에서 버락 오바마 2기 팀의 대북(對北) 신뢰도는 역대 정부 중 가장 낮은 수준일 것”이라며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북한의 말이라면 의심부터 하고 들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대북 협상팀 잔혹사는 워싱턴 외교가에 회자(膾炙)되는 불쾌한 경험 중에서도 꽤 순위가 높다. 오바마 행정부 대북 정책팀의 거의 대부분이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1992∼2000년) 북한을 다뤄봤고, 또 속아 봤던 사람들인지라 공감대가 더 깊다. 북한이 협상가의 무덤이라는 말이 돌다 보니 선뜻 북한 관련 일을 맡으려는 사람을 찾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다. 5년째 회담이 열리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4월 클리퍼드 하트가 내놓은 6자회담 특사 자리는 여전히 공석이다.

워싱턴에는 유명한 ‘비둘기’가 한 명 더 있다. 로버트 킹 국무부 북한인권특사다. 그는 하원외교위원장으로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했고 북한인권법도 발의한 톰 랜토스 의원 비서실장 출신이다. 그래서인지 북한문제에 대한 킹의 열정은 유명하다. 그의 오늘은 북한을 매의 눈으로 보지 않고, 북한사람을 돕고 싶다는 가슴으로 대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필자와 만났을 때도 그런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킹의 방북이 북한의 갑작스러운 초청 철회로 무산됐다. 방북 전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태도가 참 북한스럽다. 미국이 전략폭격기를 한반도에 띄워 인도주의적 대화 분위기를 망쳤다는 핑계를 댔지만 속내는 다르다. 미국 정부가 킹의 방북 목적을 300일 넘게 북한에 억류 중인 케네스 배의 석방문제로 국한하자 토라진 북한이 특유의 ‘갑질’을 한 것이다. 북한은 북-미 대화 재개나 대북제재 철회라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다.

킹의 집무실은 국무부 5층 5209호실이다. 데이비스와 비서실을 공유하는 한지붕 두 가족이다. 방북 무산 후 처음 출근한 킹을 맞을 데이비스의 반응이 궁금하다.

“밥(킹 특사의 애칭) 자네도 당했나?”

“거 참. 사람 꼴 우습게 됐네, 글린.”

워싱턴에서 비둘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이야 더이상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희귀종인 워싱턴 비둘기가 멸종되는 상황이라면 북한도 심각성을 통감해야 한다. 적어도 내 눈엔 대북 협상가의 생존이 힘들 정도로 파괴된 외교 생태계의 복수는 이미 한참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