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미술관 ‘글字, 그림이 된다’전
서울 포스코미술관의 ‘글자, 그림이 되다’전은 20세기 추상미술을 관통하는 동양의 서예 정신을 이산해 이광사 강세황 등이 남긴 조선시대 글씨와 운보 김기창의 작품(왼쪽 그림),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화 등 국내외 서체 추상미술을 통해 조명한다. 포스코미술관 제공
서울 역삼동 포스코미술관의 ‘글字, 그림이 된다’전은 이런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자리다. 조선시대 서예의 전통을 세운 안평대군 황기로 백광훈 이광사 등의 작품을 중심에 놓고 서예에서 예술의 뿌리와 회화의 돌파구를 탐색한 국내외 예술가 33명의 50점을 선보였다. 이질적일 것 같은데 옛 글씨와 현대 추상회화가 전시장에 조화를 이루며 독특한 매력을 뿜어낸다.
전시는 추상미술을 어렵게만 생각하거나 서예를 잊혀진 유산으로 바라보는 인식에 도전한다. 김윤희 선임 큐레이터는 “추상회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동시에 서예를 농담의 변화와 붓의 흔적 등 그림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안하고자 했다”라고 말했다. 출품작 중 상당수는 개인소장품으로 어렵사리 바깥나들이를 한 만큼 서예애호가와 미술애호가에게 두루 즐거운 자리다. 10월 22일까지(일요일 휴관). 무료. 02-3457-1665
미술관에선 16세기 문장가 이산해의 초서와 이우환의 ‘선으로부터’가 먼저 관객을 반겨 준다. 두 작품에서 필선의 강약, 먹의 농담을 비교하면 흥미롭다. 뒤를 이어 한글 서예의 새로운 미학을 연 서희환과 한지에 스며든 먹의 느낌을 살린 윤형근의 그림이 대비를 이룬다. 조선 후기 이광사의 작품과 윤명로의 회화는 각기 문자와 풍경으로 분화된 붓질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옛 글씨로는 조선 말기 평양에서 글씨로 명성이 높았던 눌인 조광진이 손가락으로 쓴 글씨 ‘강산여화(江山如畵)’와 추사 김정희의 발문을 탁본한 작품이 가장 돋보인다. 미수 허목의 해서 작품은 얼핏 삐뚤빼뚤 연습한 듯 보이지만 탁월한 조형미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작고 미술가 중 1970년대 서예가 갖는 조형의 기본을 현대화한 ‘문자 추상’을 선보인 이응노의 ‘군상’, 인간의 정신적 표현을 상형문자 속에 담아낸 남관의 ‘흑과 백의 율동’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생존 작가로는 이강소와 오수환이 서예의 획이 가진 느낌을 추상회화의 어법에 표현하면서도 서로 다른 결을 드러낸다. 전통 서예와 현대적 서체 추상, 그 멀고도 가까운 관계를 엿볼 수 있다.
○ 동과 서의 만남
서예의 일필휘지와 같이 캔버스에 날카로운 칼자국만 남긴 루초 폰타나의 작품. 포스코미술관 제공
예컨대 추사의 글씨와 굵은 붓질로 이미지를 뒤덮은 리히터의 그림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에 대한 표현이며, 운보의 활달한 붓질과 폰타나가 남긴 칼자국은 단 한 번의 몸짓으로 ‘일획’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수묵으로 그린 서세옥의 ‘춤추는 사람들’과 화려한 선과 색채로 완성된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샘 프랜시스의 그림은 여백과 회화적 공간감이란 측면에서 닮아 있다. 자유로운 표현을 담아낸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마송, 미술작품을 하나의 기호체계로 해석한 독일 작가 A R 펭크의 작품도 서예와 문자추상에 뿌리가 닿아 있다.
서예의 추상성과 정신성을 고갱이로 삼은 옛 선인의 글씨와 동서양의 추상화, 20세기 추상미술의 전개 과정에서 동양을 대표하는 문자 예술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음을 새삼 일깨운다.
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