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인준 주필
하지만 17일간의 비밀 체류 경험은 김영환이 북한과 주체사상에 대한 환상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북한은 잔인한 계급사회이고, 수령(김일성)이 오류를 범하면 그 오류가 곧 진실이 되는 체제’라고 파악했다. 그러나 김영환은 김일성한테서 40만 달러를 받아 왔고, 1992년 북한이 남한 내 지하 전위당(前衛黨)으로 삼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조직해 1인자인 중앙위원장이 되었다. 요즘 내란음모 사건으로 시끄러운 이석기는 당시 민혁당 경기남부위원장으로 당 서열 5, 6위 정도였다. 이석기는 당 2인자 하영옥 중앙위원의 지도를 받았고, 하영옥은 북한을 지도부로 섬겨야 한다며 북한과 거리를 두려던 김영환과 노선 갈등을 빚었다.
김영환은 1995년 “북한 추종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고 공개 천명했고, 1998년 “북한의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거대한 사기극”이라며 북한과의 결별을 공식 선언했다. 1999년에는 “김정일 정권 타도를 위한 좌우 대합작을 제안한다”며 “좌파일수록 김정일 타도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환은 “나의 치명적인 오류는 친북적인 분위기가 운동권에 널리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라고 자신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의 ‘혁명’은 남한을 향한 것이 아니라 북한을 향한 것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작년 8월 초 김영환은 중국에서 당한 극심한 고문으로 몸이 피폐해 있었지만 형형한 눈빛에 깊은 목소리로 “나는 혁명가”라고 말했다. 북한 주민들이 자유민주의 햇볕을 쬐는 날까지 그의 혁명은 계속될 것으로 보였다.
이석기는 김영환과 달리 종북을 수구(守舊)해 북한 맹종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김일성이 좌우명으로 내걸었다는 이민위천(以民爲天·백성을 하늘처럼 여긴다)을 똑같이 걸어 놓고, 북한의 핵 개발 논리를 똑같이 외치며, 북한이 정전협정 폐기를 들고 나오자 우리도 전쟁 준비를 하자고 설치는 것이 바로 이석기 패거리이다.
이민위천 한다면서 6·25전쟁을 일으켜 동족 300만 명을 희생시킨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수백만 주민을 굶겨 죽이고 또 수십만 명을 생지옥 같은 수용소에 가둬 자유와 생명을 앗은 것이 김일성 김정일 부자이다. 자신들의 세습 독재와 호화 사치를 유지하기 위해 주민을 짐승보다 못한 노예로, 인질로 삼아 인적 물적 자원을 착취하는 것이 그들이다.
대한민국에도 반(反)민주의 시대가 있었다. 건국과 부국의 길 닦기에 헌신한 것이 이승만이었고 박정희였지만 독재도 했다. 그래서 민주화를 위한 반정부 활동이 ‘더 바른 나라 만들기’의 한 과정으로서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러나 오늘날 남쪽 5000만, 북쪽 2400만의 삶을 대비해 보면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큰 축복이고, 경제적 성공이 얼마나 절실한 민생의 조건인지 누구라도 깨달을 수 있다. 대한민국은 식민지에서 풀려난 140여 신생국 중에서 유일하게 두 가지를 다 이루었다.
북한은 세습 독재 병영(兵營)체제 아래 문명 아닌 야만으로 돌아갔다. 이석기는 이런 체제를 위해 대한민국을 저주하고 파괴하는 짓을 ‘남녘의 혁명’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수사를 ‘민주주의 파괴’라고 떠든다. 김일성이 이민위천을 외친 것과 닮았다.
사상 전환은 죽음 다음으로 어렵다지만 이석기가 지금이라도 김영환의 길을 따른다면 마지막 구원의 문은 열려 있을지 모른다.
배인준 주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