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104>10월 26일 밤
10·26 현장검증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동아일보DB
‘김정섭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김재규가 와이셔츠 바람으로 불쑥 나타났다. 7시 10분께였다. “정 총장, 정말 미안합니다.” 나는 그가 이미 대통령 만찬에 가고 없는 줄 알았던 터라 적잖이 놀랐다. 김재규가 이제야 (만찬장에) 가는구나 생각하면서 그의 사과에 “개의치 말라”고 대답해 주었다. “김영삼이도 내가 다 손을 들게 만들어 놓았는데 제 말을 안 들어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 정치하기가 정말 힘듭니다.” 김재규는 호들갑을 떨어가며 억지로 너털웃음을 웃고는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갔다. 다시 김정섭과 얘기를 나누다가 자리를 식당으로 옮겨 저녁을 했다.’
이어서는 김계원 실장의 회고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그의 증언은 수사발표 자료와 대동소이하지만 그때 그 현장에 있었던 마지막 생존자여서 그런지 대화가 더 구체적이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브라운 국방장관이 오기 전에 김영삼을 구속 기소하려고 했는데 유혁인(정무수석비서관)이 말려서 취소했더니 역시 혼란만 커졌어. 한미국방회의고 뭐고 볼 것 없이 법대로 하는데 무엇이 잘못이라는 말이야. 미국 놈은 법을 어기면 처벌 안 하나.”
그러자 김재규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끼어들었다. “김영삼은 사법조치만 안 했을 뿐이지 이미 국회에서 제명된 것만으로도 처벌했다고 국민들은 봅니다.”
이 말을 대통령이 다시 받았다. “중앙정보부가 좀 매섭게 해야지. 야당 의원들의 비행(非行) 사실만 움켜쥐고 있으면 무엇 해. 딱딱 입건해 잡아들여야 될 것 아냐.”
그러자 차지철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끼어들었다. “신민당 놈들 그만두고 싶은 놈은 한 명도 없습니다. 언론을 등에 업고 반정부 선동해서 그렇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봅니다. 그 자식들, 신민당이고 뭐고 뛰쳐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 뭉개버리고 말겠어요.”
이때 별안간 김재규가 오른손으로 김 실장의 왼쪽 허리를 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실장님! 각하를 똑바로 모십시오!”
김 실장의 증언이다.
‘그의 얼굴은 어두운 조명에서도 창백함을 넘어 엽기적이고 실성한 표정이었는데 앉은 자세에서 불쑥 오른손에 권총을 꺼내 들고 차 실장을 겨냥했다. “차지철 이놈아! 각하! 이런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무슨 정치를 하신다고 그러십니까!” 청천벽력으로 살기(殺氣)에 찬 김재규의 권총이 자신을 겨냥한 것에 당황한 차지철은 이렇게 외쳤다. “김 부장, 왜 이래! 어! 김 부장, 왜 그래!” 차 실장이 소리치며 총구를 손으로 내치려는 순간, 권총 방아쇠가 당겨졌다. 제1발은 그의 오른팔 손목을 관통하였다. 차 실장은 계속 소리를 지르며 대통령 오른쪽에 있던 화장실로 피신했다. “각하 앞에서 이게 무슨 짓들이야!”(김 실장) “뭣들 하는 거야!”(박 대통령) 나의 고함과 대통령의 고성(高聲)에 이미 이성을 상실한 김재규는 잠시 자신의 모든 행동을 멈추는 듯하였으나 돌연 작정한 듯 외쳤다. “각하도 죽어 주십시오!” 그는 이렇게 절규하면서 대통령을 향해 제2탄을 발사했다. 대통령은 식탁 밑에 만들어 놓은 발판 아래로 상반신을 왼쪽으로 기울이며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대통령 각하가 앉은 자세로 흉부에 관통상을 입고 왼쪽으로 쓰러지자 동석했던 심 양, 신 양은 쓰러지는 각하를 부축하고 유혈이 낭자한 가슴과 등을 손바닥으로 막아 지혈시키면서 “각하 괜찮으십니까?” 묻자 각하께서는 “나는 괜찮아” 하시면서 상반신을 숙이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동석했던 가수 심수봉은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의 참고인 진술조서에서 “차 실장이 화장실을 갔다 나오면서 ‘각하 괜찮으십니까’ 물었을 때 각하께서는 ‘나는 괜찮아’ 하셨는데 본인이 옆에서 보니 호흡이 이상한 것 같아 ‘괜찮으시냐’ 다시 물으니 ‘괜찮다’고 하셨는데 곧 앞으로 쓰러지셨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또 신재순은 조갑제 월간조선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최후’를 이렇게 말한다.
“그날 밤 대통령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말이 헛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같았어요. 피를 쏟으면서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또박또박 했으니까요. 그 말은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라는 뜻이었습니다. 일국의 대통령이시니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 주시는구나 생각했었죠. 그분의 마지막은 체념한 모습이었는데 허무적이라기보다는 해탈한 모습 같았다고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들 하는 거야’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어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까요.”
다시 김계원 비서실장의 회고다.
‘나는 갑작스러운 차지철을 향한 총격에 처음에는 대통령이 그 밑으로 들어가서 피신한 줄 알았다. 근래에 대통령에 대한 원망과 주연(酒宴)에서의 꾸지람은 인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이었다 하여도 설마 김재규 자신의 충성의 본체인 각하를 향해 총구를 겨눌 줄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안 돼!” (나는) 김 부장이 대통령을 향하여 겨누는 모습을 보고 순간 그의 총을 손으로 밀쳤다. 그러나 이미 권총은 격발되었고 대통령은 쓰러지셨다. 김 부장은 계속 쏘려고 하였으나 권총이 장전되지 않자 당황했다. 계속 노리쇠를 후퇴시키고 반복하여도 되지 않자 현관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곧 다른 권총을 들고 다시 다가서며 3번째 총격을 가했다. 순간 전기가 끊긴 듯 실내조명이 전부 꺼져버렸다. 두 달 전 이곳에서 각하를 모시고 행사를 할 때에 대통령이 실내등을 끄라 해서, 내가 연회장의 전등 스위치를 내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스위치 위치를 기억하고 문 밖 왼쪽에 있는 스위치를 향해 달려갔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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