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스포츠로 진화한 무예
봉희(棒戱)와 장치기(사진)는 말을 타고 격렬하게 공을 다투는 군사 훈련인 격구(擊毬)에서 파생된 놀이로 알려져 있다. 그 뿌리가 같지만 두 놀이에는 차이가 있다. 봉희가 오늘날 골프와 닮았다면 장치기는 하키와 비슷하다. 사진은 2008년 10월 충남 서산시에서 열린 축제 참가자들이 장치기를 재연한 모습. 서산시청 제공
오늘날의 골프를 연상시키는 놀이
격구(擊毬)는 말을 탄 채로 구장(毬杖)이라는 긴 채를 이용해 공을 구문(골대)에 넣는 군사 무예 수련법이었다. 최근 TV 사극 등을 통해서 종종 소개되면서 현대인에게도 알려졌다. 격구는 기병들이 익혀야 했던 최고의 기마술 훈련이자 백성들이 관람하며 즐기기도 하는 군사 스포츠이기도 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뛰어난 격구 실력을 지닌 당대 최고의 스포츠 스타였다.
그런데 이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하려면 반드시 말(馬)이 필요했다. 격구를 지켜본 당대 아이들은 이 경기를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들에게 말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서 격구를 흉내 내 만든 것이 바로 ‘말 없이’ 땅 위에서 막대기로 공을 치는 방식의 놀이였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봉희(棒戱)’다. 막대기(棒)를 가지고 논다(戱)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봉희에 대한 기록을 보면 지금의 골프가 연상된다. 봉희에 쓰는 봉을 만들 때는 두꺼운 대나무를 쪼갠 후 이어 붙여 탄성을 높였다. 골프채도 처음에는 나무로 허리 부분인 샤프트를 만들었다고 하니 시작부터 닮았다고 할 수 있겠다. 또 봉이 공을 때리는 부분은 숟가락 모양으로 오목하게 만들었는데 여기에 물소 가죽을 씌워 타격의 정확도를 높였다. 이 가죽이 얇으면 공이 높이 솟구치고, 반대로 두꺼우면 공이 낮게 깔려 나간다고 기록돼 있다. 필요에 따라 다른 봉을 썼단 얘기다. 골프 선수들이 몇 번 우드, 몇 번 아이언을 쓸 것인지 고민하듯 조선시대 아이들도 비슷한 고민을 했을 법하다.
공을 넣는 구멍도 있었다. 이 구멍을 봉희에서는 ‘와아(窩兒)’라고 불렀다. 주발(음식 담는 작은 그릇) 모양으로 땅을 파서 만들었다. 골프에서 여러 코스를 이동하듯 봉희를 할 때도 집 마당 여기저기, 그리고 골목길까지 연결해 구멍을 뚫어 놓고 놀이를 즐겼다. 집과 집 사이에 교묘하게 구멍을 뚫어 놓거나 심지어 평지가 아닌 섬돌 위에 억지로 구멍을 뚫기도 했다.
봉희에서 사용하는 공 크기는 달걀만 했다. 몇 번 때려서 구멍에 넣느냐에 따라 점수를 다르게 준 점도 골프를 연상시킨다. 봉희에서 단번에 공을 집어넣으면 점수를 계산하는 가지를 2개 얻고, 두 번 또는 세 번 쳐서 들어가면 1개를 얻었다. 친 공이 다른 사람의 공과 부딪치게 되면 그 공은 죽는 규칙도 있었다. 여기에 공과 구멍의 위치에 따라 서서 치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스윙 방식이 있었으니 골프보다 더 자유로운 게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게임 방식도 개인전은 물론이고 수십 명이 함께 조를 이뤄 펼치는 단체전까지 다양했다.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골목길에서 막대기를 들고 즐겁게 뛰어다니는 조선시대 아이들을 떠올리는 건 비단 필자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세조 1년(1455년) 9월 8일자에 자세히 담겨 있다.
이처럼 군사들의 전투훈련 중 하나였던 격구가 민간으로 흘러들어 가 아이들이 골목길에서 할 수 있는 놀이로 변화한 모습은 무예가 어떻게 변하고 전파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무예가 한 시대를 아우를 수 있는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해주기도 한다. 무예를 단순한 전투기술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문화사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무예에서 비롯된 조선시대 공놀이가 서양에서 탄생해 발전한 게임과 유사한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이는 무예와 그것에서 발전한 놀이, 스포츠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문화활동이란 증거다. 이런 점이 필자가 무예에 미쳐서 사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역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