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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이슈]다마스로 두달간 유라시아 횡단한 성우 배한성 씨

입력 | 2013-09-07 03:00:00

“최고 시속 120km… 그래도 아우토반 달렸죠”




배한성 씨가 3일 유라시아 대륙횡단 당시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짧지만 강렬했던 만남이었다.

고작 두 달이었지만 함께한 거리는 지구 반 바퀴인 2만 km나 됐다. 처음에는 타고 달리는 교통수단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유쾌한 여행의 ‘동반자’였고, 영하 20도의 추위도 이겨내게 해준 고마운 ‘보금자리’였다.

1992년 가을의 배한성 씨(67·성우)에게 대우자동차(현 한국GM)의 다마스는 그런 존재였다. 배 씨는 40대 중반의 적잖은 나이에 다마스를 몰고 유라시아 횡단에 나섰다. 영국에서 활동하던 화가 정문건 씨(67·제주유리박물관장)가 아이디어를 냈고, 두 동갑내기의 도전을 기록하기 위해 스포츠신문 기자, 사진작가 1명씩이 동행했다.

화려한 출정식

그해 8월 한중 수교가 이뤄졌다. 구소련(러시아), 체코, 폴란드 등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이미 1980년대 말부터 잇달아 수교한 상황이었다. 배 씨 일행이 영국 런던 교외의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유럽대륙과 소련을 가로지른 뒤 중국 베이징(北京)의 톈안먼(天安門)광장까지 육로로 달리겠다는 ‘정신 나간 계획’을 세운 것도 그 덕분에 가능했다.

처음엔 대우의 티코만을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티코엔 짐을 실을 공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도우미로 등장한 차가 당시까진 ‘패밀리 레저용’으로 광고했던 다마스였다.

9월 어느 날 서울 김포공항은 이들의 ‘출정식’을 알리는 행사로 떠들썩했다. 당시 티코의 광고모델이었던 배우 김혜수 씨(43)가 나와 화환까지 걸어줬다. 도전자 4명과 티코, 그리고 다마스는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생사고락을 함께하다

최고 속도가 시속 110∼120km에 불과하던 다마스는 유럽에서 그 자체로도 구경거리였다. 그래도 아우토반을 신나게 달릴 때는 그야말로 ‘여행의 재미’를 온 몸으로 느꼈다.

문제는 국경을 지날 때였다. 특히 한국과 막 수교를 맺은 동유럽 국가들은 ‘이방인’의 입국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자동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한국인은 처음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체코,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을 거치면서 각국의 국경수비대와 몇 번의 실랑이를 벌였는지 몰랐다.

그래도 소련에서의 고행에 비하면 이는 약과였다. 500km마다 겨우 하나 있을까 말까 했던 소련의 여관들은 하나같이 숙박을 거부했다. 어차피 개인 소유가 아니니 낯선 자들에게 방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달러를 내밀어도 소용이 없었다.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차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추위를 견디려면 히터를 쓸 수 있게 교대로 운전하면서 밤새 달리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나마 차들이 큰 고장을 일으키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모스크바를 출발해 우랄산맥을 넘고, 바이칼 호수를 지나 시베리아의 빙판길을 달릴 때는 아찔한 위기도 여러 번 만났다. 차가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게 파둔 도로 가장자리의 ‘V자 홈’에 빠져 지나던 트레일러의 도움으로 구출된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

추억을 함께한 친구


소련에서 중국으로 넘어갈 때는 잠시 다마스와 이별해야 했다. 제3국 사람이 자동차를 몰고 국경지대를 지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배 씨 일행은 창춘(長春)까지 기차를 타고 갔고, 중국인 2명을 섭외해 차를 몰고 오도록 했다.

종착지인 톈안먼 광장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물론 다마스와 티코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렇지만 다마스는 11월 귀국 후 김포공항에서 서울역 앞 대우본사까지 펼쳐진 카퍼레이드까지 마친 뒤에야 임무를 끝냈다. 이후 다마스와 티코는 경남 창원시 성산구의 당시 대우그룹 연수관에 전시됐다. 그러다 2004년 연수관이 리모델링하면서 한 자동차 정비 교육기관에 실습용 교보재로 기증됐다.

배 씨는 최근 다마스의 단종 소식을 전해 듣고 난 뒤 가슴 한쪽이 짠해졌다고 했다.

“다마스는 21년 전 제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줬죠. 그런 차가 이제 곧 없어진다고 하니, 뭐랄까요, 친구 하나가 앞서 세상을 뜨는 것 같은 진한 아쉬움이 드네요.”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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