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에 등 떼밀린 국방부 갈팡질팡…미래 설계보다 불 끄기 급급
제2차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에 참석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8월 28일(현지시각) 브루나이에서 열린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척 헤이글 미국 국방부 장관과 대화하고 있다.
샹그릴라(Shangri-la). ‘푸른 달빛의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이 낭만적인 티베트어가 대한민국 국방부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떠올랐다. 지난 한 달 안보당국 주변에서 “그게 그러니까 샹그릴라에서…”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회자됐기 때문. 기묘한 상황의 출발은 6월 1일 싱가포르 샹그릴라호텔에서 열린 제12차 아시아 안보회의. 통상 ‘샹그릴라 회의’로 부르는 이 자리에서 한미 양국 국방부 장관이 마주 앉아 회담을 했다.
그 직후 쏟아져 나온 언론 보도는 이른바 ‘연합전구사령부 창설 방안’이었다. 2015년 12월 1일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이 한국군으로 전환된 후에도 현재의 한미연합사령부에 준하는 체제를 유지하되, 그 대신 사령관은 한국군 합참의장이 맡고 부사령관을 주한미군사령관이 맡는다는 파격적인 그림이었다.
그러나 50여 일이 지난 7월 중순, 전혀 다른 소식이 워싱턴으로부터 전해졌다. 문제의 샹그릴라 회담에서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북핵 문제를 고려해 전작권 전환 문제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자”고 척 헤이글 미국 국방부 장관에게 제안했다는 것. 한국 국방부도 “전환 일정을 검증할 틀을 갖고 구체적으로 상황을 평가하자고 제의했다”며 관련 보도를 사실상 확인했다. 한마디로 전작권 전환 재연기를 공식 논의했다는 이야기였다.
전작권 혼선에 혼선 거듭
논의를 정리해보면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샹그릴라 회담을 전후해 국방부는 연합전구사령부(전구사령부) 방안과 전작권 재연기를 모두 추진했고, 이를 한꺼번에 미국 측과 논의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 이 무렵 한 군사전문가는 “전환이 미뤄진다면, 그것도 요즘 나오는 말처럼 시점을 특정하지 않고 연기한다면 전구사령부 방안은 사실상 의미가 없어진다. 양립하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뜻이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거나, 그사이에 무언가 일이 벌어져 논의가 엉킨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불과 수십여 일 사이에 극과 극으로 오간 논의 배경에 알려지지 않은 사연이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이 증폭된 이유다.
다시 40여 일 후인 8월 말 현재, 논의는 여전히 안갯속을 헤맨다. 당초 국방부는 8월 28일 브루나이에서 열리는 아세안 확대 국방장관회의에서 양국 장관이 재연기 문제를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지만, 정작 회담에서 미국 측은 이에 대해 유보적 태도를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사이 한국 측은 재연기로 완전히 자세를 바꿨고, 그에 맞춰 8월 19일 시작된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 계획을 급히 변경하기도 했다. 당초 이 훈련에서 전구사령부 방안이 상정한 지휘체계를 시험 가동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재연기 논의에 무게를 실으면서 취소했다는 것이다.
을지프리덤가디언(UFG) 훈련이 진행 중이던 8월 22일 박근혜 대통령이 한미연합사 훈련현장을 방문해 격려의 말을 하고 있다. 제임스 서먼 한미연합사령관(뒷줄 왼쪽)과 권오성 부사령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이를 엿볼 수 있는 첫 번째 단추는 4월 MCM 직후 국방부가 출입기자단을 상대로 연 백그라운드 브리핑이다. ‘한미연합사 사실상 존속’을 골자로 회의 논의사항을 설명한 이날 브리핑에는 단서가 달려 있었다. 6월 1일 샹그릴라 회담에서 양측 국방부 장관이 최종 합의에 이를 때까지 보도를 유예해달라는 엠바고 요청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방부는 6월 초가 되면 전구사령부 방안을 공식적으로 공개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는 뜻이다.
‘산토끼 유권자’ 잡으려 좌클릭
그리고 문제의 샹그릴라 회담. 현지에 간 취재기자들은 엠바고 시점이 종료됨에 따라 회담장을 나서는 김 장관과 국방부 측에 예정됐던 전구사령부 방안이 합의됐는지 물었다. 그러나 현재 시점에서 복기해보면, 이 시기 김 장관과 국방부의 처지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내부적으로는 재연기 추진 방침을 굳혀 회담장에서 미 측에 제의한 상태였고, 전구사령부 아이디어는 공식화하기도 전에 시야 밖으로 사라진 상황이었기 때문. 그러나 재연기 추진 사실을 공개할 수 없었던 국방부는 4월의 백그라운드 브리핑 내용을 재확인하며 “10월 SCM(한미 연례안보협의회의)에서 확정될 것”이라고 단서를 다는 ‘꼼수’를 택했다. 안에서는 이미 동력을 잃은 전구사령부 방안을 대대적으로 국민에게 홍보하는 소극(笑劇)이 시작됐다.
다시 궁금증은 한 가지 질문으로 모인다. 4월 중순 백그라운드 브리핑과 6월 초 샹그릴라 회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전작권에 대한 우리 측 입장이 180도 바뀐 것일까. 눈여겨 볼 것은 청와대의 관련 언급이 미세하게 변화해왔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선거 당시 박근혜 캠프는 ‘2015년 전시작전권 전환 차질 없이 준비’를 공약집에 명기했고, 2월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작성한 안보 분야 국정 과제에도 ‘전작권 전환 정상 추진’이 포함됐다. 그러나 5월 28일 국무회의에서 확정한 ‘국정과제 추진계획’에서 관련 문구는 ‘체계적 추진’으로 바뀌었다. 2015년 전환을 명기한 ‘전략동맹 2015’에 관한 언급도 빠졌다.
안보당국 관계자들의 설명을 종합해보면, 혼란의 뿌리는 이렇듯 선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미 2012년 초부터 전작권 문제에 대한 캠프 주요 인사들의 시각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는 것. 한쪽은 전환 재연기, 그것도 시점을 특정하지 않고 ‘북핵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미뤄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제기했지만, 다른 한쪽은 “그럴 경우 국민 볼 낯이 없다. 득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반론을 폈다. 전자는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을 비롯한 군 출신 인사들이, 후자는 국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인 그룹이 주축을 이뤘다. 캠프에 참여했던 인사의 말이다.
“내부 논의로만 따지면 재연기 주장에 힘이 실렸다. 그러나 선거 때는 선거 논리가 먹히는 법 아닌가. ‘산토끼 유권자’를 잡으려면 일종의 ‘좌클릭’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최종적으로 채택했다. 다만 전환 일정은 예정대로 가되 연합사 기능을 사실상 존속하는 대안을 만들면 된다는 타협점도 찾았다. 2011년부터 거론되던 ‘미니연합사’ 구상을 본격화하자는 그림이었다. 결국 공약집에는 ‘예정대로 추진’이 들어갔고, 내부적으로는 ‘한국군 합참의장이 지휘하는 연합사 존속’으로 가닥이 잡혔다. 물론 군 출신 인사들은 선거 승리 후 다시 논의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작권 문제는 선거 후 다시 논의하면 된다’던 생각도 이내 현실이 됐다. 복무기간 단축과 전작권 전환을 반대하는 군 출신 그룹의 ‘수장’이던 남재준 원장은 3월 인사청문회 과정에서부터 재연기가 필요하다는 소신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나섰다. 4월 MCM을 통해 전구사령부 방안이 양국 협의 수준까지 급물살을 타고 백그라운드 브리핑을 통해 언론에 알려지자, ‘재연기파’의 움직임도 함께 빨라졌다는 게 정부 당국자들의 설명.
특히 이 무렵부터 안보 관련 논의의 균형추가 남 원장 쪽으로 급속히 기울기 시작하면서 박근혜 대통령 본인을 비롯한 청와대 내부에서 재연기론이 힘을 얻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남 원장이 직접 ‘시기상조론’을 대통령에게 대면보고 했다는 것이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의제를 정리하던 4월 하순 관련 논의가 숨 가쁘게 전개됐고, 대통령이 ‘최종 결심’을 내렸다는 이야기다.
방한한 존 매케인 미 상원의원이 8월 26일 서울 종로구 아산정책연구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방부는 갈 지(之) 자처럼 흔들려야 했다. 한 군당국 관계자는 “선거 당시 공약과 정부 내부 논의 혼선이 겹치면서 지침이 엉킨 탓에 국방부만 전구사령부 방안이라는 ‘헛발질’을 한 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국방부 역시 할 말이 없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애초에 두 장의 카드를 놓고 눈치만 보다가, 후자로 무게가 쏠리자 전구사령부 방안은 아예 제쳐두고 재연기에 매달린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안보부처 고위직을 역임한 한 학계 전문가는 “정확한 안보 상황 판단이나 비전보다 ‘윗선 분위기’에 몸을 맡기면서 자초한 결과”라고 촌평했다.
매케인 의원 발언 덮기에 바빠
문제는 이러한 갈 지 자 행보에 따라 한국군의 미래를 그리는 작업에도 혼란만 가중됐다는 사실이다. 한동안 합동참모본부와 국방부 실무자들이 매진했던 전구사령부 구성 작업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라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 청사는 어떻게 쓸 것인지, 미군 측 인원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지, 관련 부대시설 마련에 필요한 예산은 얼마인지 등을 검토하느라 쏟아 부은 공력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평택 미군기지 이전이나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 전작권 문제와 긴밀히 연동해 있는 주요 이슈도 함께 요동쳤다. 전구사령부 방안에 대해 봇물 터지듯 했던 사회적 논의나 언론 보도도 헛일이 되기는 마찬가지. 국회 국방위원회 관계자의 말이다.
“결국 책임의 큰 축은 김관진 장관에게 향할 수밖에 없다. 뚜렷한 소신이나 원칙을 갖고 움직였다면, 최소한 정부 핵심의 전작권 논의 흐름을 면밀하게 주도하기만 했어도 혼선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합참의장 시절에는 전작권 전환 준비를 진두지휘했다가, 최근까지는 장관으로서 연합지휘구조 개선에 무게를 실었다가, 청와대 지침이 바뀌자 이제는 재연기에 앞장 선 셈 아닌가. 그 과정에서 어느 것이 한국군의 미래를 위해 가장 적합한 비전인지에 대한 고민은 설 자리를 잃었고, 번복되는 계획에 정책 에너지만 낭비됐다. 김 장관으로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8월 26일, 2008년 미국 대선의 공화당 후보이자 상원 군사위원회 소속인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 정부의 시퀘스터(Sequester) 조치로 국방비가 줄어들면 한국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밝혀 파장을 일으켰다. 이 문제가 한반도 안보에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던 한미 양국의 그간 설명과 정면으로 배치됐기 때문. 국방부는 “매케인 의원이 미국 정부 관계자가 아니지 않느냐”며 논란 최소화에 힘썼다. 닥쳐오는 변화가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정교한 미래정책 설계보다 당장의 불 끄기에만 매달리는 한국군의 현실이다.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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