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사회 조선시대 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들]<1>가의대부 촌은 유희경
조선 중기의 소문난 기생이자 여류시인인 매창(1573∼1610)이 사랑한 남자, 당대 학자들이 모여든 문화 사랑방을 이끈 문인. 바로 천민 출신으로 종2품(조선시대 18품계의 벼슬 중 네 번째 품계) 가의대부 작위까지 받은 촌은 유희경(村隱 劉希慶·1545∼1636)이다.
“남쪽 지방 계랑(매창)의 이름을 일찍이 들었는데/시와 노래 솜씨가 서울에까지 울리더군/오늘 그 진면목을 보고 나니/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구나” 1591년 봄날 남도를 여행하던 유희경이 매창을 처음 찾아와 지어 준 시다.
유희경의 문집 ‘촌은집’에 따르면 그는 생전에 종2품 가의대부 작위를 하사받고 사후에는 정2품(18품계 중 세 번째) 한성부 판윤에 추증됐다. 역대 위인 1000여 명을 기록한 ‘동국시화휘성’에는 단군, 왕건, 이성계 등과 함께 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천민으로 태어난 유희경은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삼년상을 치렀는데 이 소식이 당대의 학자 남언경의 귀에 들어갔다. 남언경에게 정통 예법을 배운 유희경은 천민으로는 드물게 손꼽히는 상·장례 전문가로 성장했다. 일반인에게 상·장례 전반을 조언하고 장례를 도맡아 했다.
그는 상갓집에 불려 다니면서 틈틈이 시를 즐겨 지었다. 문치주의 국가 조선에서는 신분이 낮다고 해서 글을 배우는 것이 금지되진 않았고 서당에서 누구나 글을 익힐 수 있었다. 유희경은 독서당을 드나들면서 영의정을 지낸 박순을 만났다. 유희경의 시를 높이 평가한 박순이 그에게 본격적으로 시를 가르쳤고 그는 더 많은 사대부와 교류하게 되었다.
유희경은 1601년 창덕궁 서쪽 계곡 금천 근처에 돌을 쌓아 침류대(枕流臺)라 이름 짓고 이곳에서 시를 썼다. 임진왜란 이후 이곳에는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과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을 비롯해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와 관료들이 찾아와 시를 나누고 풍류를 즐겼다.
당대의 문화 사랑방이던 침류대를 드나든 학자들은 대부분 서경덕의 학풍을 계승한 이들이었다. 서경덕은 당시 이단으로 취급된 양명학과 도교를 받아들이는 등 개방적 성향이 강했다. 이 때문에 천민 출신 유희경과도 격의 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는 신분 이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였다. 유희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양인이 되었고, 이후 양반 사대부들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했다. 1609년에는 조정에서 중국 사신들의 접대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부녀자들의 반지를 거둬 충당하자는 해결책을 내 정3품 당상관의 작위를 받았다.
매창과 유희경이 다시 만난 것은 이별 후 15년 만이었다. 유희경은 매창의 고향인 전북 부안의 명소를 함께 돌아다니며 시를 읊고 사랑을 노래했다. 하지만 뭇 남성을 상대해야 하는 기생과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의 사랑이 이뤄질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3년 뒤 매창은 세상을 떠났다.
유희경이 말년에 지은 시들에는 여전히 매창에 대한 그리움이 드러난다. “꽃다운 넋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 땅에 묻어 주리/정미년에 다행히도 다시 만나 즐겼는데/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누나”
정리=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