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 꺼! 반칙운전]<4>싱가포르의 무관용 원칙
싱가포르는 작은 나라다. 국토면적이 697km²로 한국(9만9720km²)의 약 14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서울보다 약간 큰 정도다.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싱가포르 총인구는 530만 명. 1인당 국민소득은 5만100달러(약 5471만 원)로 아시아 국가 중 최상위권이다.
작은 나라 싱가포르가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교통안전 정책은 ‘차량 이용 억제’다. 작은 국토에 통제 불가능한 수의 차가 난립하면 도로는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1975년부터 운영하기 시작한 ERP는 운전자가 도심 주요 구간을 통과할 때 자동으로 혼잡세(약 4300원)를 부과한다. 도심 주요 구간에서 차량을 자주 이용할수록 많은 돈을 내게 만들어 결과적으로 차량 이용을 억제한다.
싱가포르의 대형 쇼핑몰과 백화점이 몰려 있는 시내 중심부 오처드 길. 이곳을 지나는 차량은 도로에 설치된 ERP 아래를 지날 때마다 자동으로 혼잡세를 낸다. 전광판에는 운영시간과 차량 종류, 요금 등이 표시된다. 싱가포르=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싱가포르 운전자는 편의점 등에서 ‘캐시카드’로 불리는 충전식 교통카드를 구입해 차량의 단말기에 장착해야 한다. 한국 고속도로에서 쓰이는 하이패스처럼 ERP 아래를 차가 지나갈 때마다 자동으로 요금이 빠져나간다. 만약 충전이 되지 않은 교통카드를 장착하고 다니며 요금징수를 피하려다간 ERP에 기록이 남는다.
ERP는 통과하는 차량을 찍는 카메라, 요금을 징수하는 장치, 요금이 부과되지 않은 차량을 기록하는 장치로 구성된다. 현지서 만난 한 택시운전사는 “캐시카드(교통카드)에 돈을 충전하지 않고 다니다가 적발되면 1000싱가포르달러(약 86만 원)가 넘는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차량 총량을 제한하는 정책도 운영 중이다. 승용차 소유를 억제하는 일종의 ‘자동차 면허 할당제(VQS·Vehicle Quota System)’다. 싱가포르에서 자가용을 구입하려면 거의 차 값과 맞먹는 가격의 10년짜리 차량 소유 허가증을 경매를 통해 발급받아야 한다. 차에 붙는 세금도 비싸 한국에서 2000만∼3000만 원 하는 승용차를 싱가포르에서 구입하려면 허가증까지 합해 8000만∼1억 원가량이 든다. 1990년 이전 연평균 7%에 이르던 승용차 증가율은 할당제 실시 이후 3%대로 줄었다. 육상교통청 관계자는 “궁극적으로 대부분의 시민이 버스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만드는 것이 싱가포르 정부의 목표”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차량 통행을 억제하는 ERP와 할당제 덕분에 싱가포르는 좁은 국토면적에도 불구하고 도로 정체나 혼잡에 시달리지 않는다.
법이 엄한 탓에 싱가포르 운전자는 교통경찰이 보이지 않아도 알아서 법을 지킨다. 한 싱가포르 운전자는 “운전을 하다 교통경찰을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이 알아서 법을 지킨다”고 말했다. 실제 취재팀이 4일간 싱가포르에서 운전을 하거나 대중교통을 타며 교통경찰이 단속하는 현장을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싱가포르 시내에서 도로를 무단횡단하는 보행자들은 볼 수 있었지만 반칙운전자들은 보기 힘들었다.
한국의 한 보험사에서 근무하다 싱가포르 현지 출장사무소에서 근무하는 한 한국인은 “특히 음주운전에 대한 처벌은 가혹하리만큼 엄격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그는 “여기서 음주운전을 하다 세 번 걸리면 태형(笞刑) 처벌을 받은 뒤 본국으로 추방된다”고 설명했다. 태형은 신체에 물리적인 타격을 가하는 형벌로서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아직까지 태형을 가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그저 몇 대 때리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틀에 묶어놓고 회초리로 허벅지 살점이 뜯기도록 때린다고 한다. 조선시대 행해지던 ‘곤장’과 비슷하다.
동행한 장 수석연구원은 “싱가포르가 국제무역 거점도시로 급성장하면서 1962∼1973년 차량도 연평균 약 9%씩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며 “이런 성장의 영향으로 교통체증 등 혼란이 예상돼 강한 법규 준수 시스템을 구축해 올바른 교통행태를 유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