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블랙코메디’ ★★★☆
연극 ‘블랙코메디’ 중 한 장면. 어둠 속에서 위태로운 욕망의 줄다리기를 벌이던 주인공 밀러(가운데)가 차츰 궁지에 몰린다. 극단 성좌 제공
“무슨 일이지? 이런…. 전기가 나갔어!”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듯 능청스럽게 바닥과 벽을 더듬거리는 배우들. 누군가 라이터와 성냥불을 밝히거나 손전등을 들면 ‘약간 밝아졌다’는 신호로 조명이 살짝 어두워진다.
2008년 영화로 만들어진 조제 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와 나란히 놓이는 시선이다. 밝은 빛에 가려지고 억눌려졌던 행동과 말이 어둠을 틈타 어떤 식으로 배출되는지. 자신을 빤히 지켜보는 상대역과 관객의 시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무대 위 일곱 인물은 몰래 험담하고, 몰래 가슴과 엉덩이를 더듬고, 몰래 키스하고, 몰래 물건을 훔치고, 몰래 서로의 뒤통수를 때린다.
하지만 집단적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들이 살인과 성폭행의 광풍에 휩쓸려가는 이야기를 그린 사라마구의 잔인한 비관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 바람둥이 한량 밀러는 어둠 속에서 두 여인의 마음을 희롱하다가 요행 찾아온 천재일우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다. 의미를 잠깐 고민해보든지 그저 웃어넘기든지, 강요는 없다. 관객의 자유다.
사람들은 극 중반 등장한 전기 수리공을 미술 애호가인 갑부로 착각한다. 자신을 떠받들어주는 분위기에 취한 수리공이 억눌려 있던 허영의 욕망을 대뜸 드러낸다. “위대한 예술은 늘 이해하기 쉽죠. 간단하지만 단순하지 않고 독창적이지만 독단적이지 않아요.”
경쟁적으로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은 그의 정체가 밝혀지자 “주제 모르는 엉터리 인간”이라며 죽일 듯 몰아세운다. 사회적 명망이 구축되는 과정의 어처구니없음에 대한 뼈 있는 농담. 억지 없는 유머에 가볍지 않은 성찰을 자꾸 젓가락 가는 나물무침처럼 소박하게 버무렸다. 익숙하고 정겹지만 맛보기 힘든 반찬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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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아 연출. 조주현 구본임 인성호 강경덕 서주성 박선정 김미라 출연. 22일까지 서울 대학로 엘림홀. 3만 원. 070-8804-9929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