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컨 대통령이 1863년 선포
진 리언 제롬 페리스가 1912∼1915년에 그린 ‘최초의 추수감사절’. 필그림과 원주민의 차림새가 정확하지 않다. 원주민이 땅바닥에 앉은 모습도 그들의 평소 관행과 다르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에 대해 오해와 왜곡이 있음을 이 작품 역시 보여준다. 미국 의회도서관 제공
‘1620년 청교도 102명이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길고 험난한 항해 끝에 (오늘날의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그해 겨울에 절반의 사람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었지만 이듬해 아메리카 원주민의 도움으로 씨앗을 뿌리고 사냥을 해서 가을에 많은 수확을 할 수 있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도운 원주민을 초대해 곡식, 채소, 칠면조를 나누어먹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는 역사적 사실의 왜곡과 과장 그리고 거짓으로 점철된 신화(神話)입니다. 첫째, 메이플라워호에 탄 사람들은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아메리카로 건너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청교도의 분파인 필그림(순례자라는 뜻)으로, 영국 국교회와 단절하고 순수한 신앙을 추구했습니다. 초기에 그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영국에서 네덜란드의 레이던으로 피신했습니다. 이들은 비숙련공이었기에 낮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경제적 처지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또 네덜란드 사회에 동화되어가는 자녀들의 필그림 신앙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아메리카로 떠났습니다.
셋째, 아메리카 원주민을 실제로 초대했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원주민 왐퍼노애그족의 추장 매서소이트가 부족원 90여 명을 이끌고 플리머스를 찾아왔습니다. 필그림보다 약 2배가 많은 인원이었습니다. 사실 필그림과 원주민은 지속적으로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많은 원주민 방문객이 찾아와 필그림이 난처할 지경이었습니다.
넷째, 아메리카 원주민이 필그림을 약간 도와준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은 필그림의 생존에 거의 절대적이었습니다. 1621년 3월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원주민인 사모셋과 스콴토가 필그림을 찾아갔습니다. 스페인과 영국의 런던에도 살았던 스콴토는 필그림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스콴토는 소총과 대포의 위력을 추장에게 알렸고 유럽인이 전염병을 퍼뜨린다고 경고하여 우호관계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필그림과 동맹관계를 맺어 다른 부족에게 대항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결국 부당한 싸움에 휘말리면 서로 도와준다는 일종의 공동방위조약이 체결되면서 평화협정이 수립됩니다.
스콴토는 필그림에게 아메리카에서의 생존법도 전했습니다. 청어나 농어 같은 어류와 야생동물을 잡는 법, 카누를 만들고 타는 법, 그리고 원주민의 농법을 전했습니다. 플리머스는 땅이 척박했기에 비료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죽은 청어를 옥수수 씨앗과 함께 심고, 옥수수 싹이 트면 콩과 호박을 심어 넝쿨이 옥수수 대를 타고 올라가면서 그늘을 만들게 함으로써 옥수수가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잘 자라게 했습니다.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방문자를 정중하게 대접하는 일은 원주민이나 필그림에게 점차 관례로 정착했습니다. 최초의 추수감사절에만 원주민을 대접한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다섯째, 추수감사절의 모습 역시 왜곡됐습니다. 그림에서 보듯, 원주민이 필그림과 식탁에 둘러앉아 손을 모아 함께 하나님께 기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최초의 추수감사절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예식이었다기보다는 일종의 축제였으니까요. 현존하는 사료에 따르면, 원주민은 3일 동안 필그림과 어울리면서 레크리에이션을 즐겼습니다.
추수감사절은 19세기에 정착됐습니다. 조지 워싱턴이 선포한 감사절은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연방헌법을 제정하고 연방정부를 수립한 일을 감사하기 위한 일회성의 조치였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1863년에 미국 내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피폐된 민심을 달래기 위해 감사절을 선포했습니다. 전쟁의 환란 속에서 미국의 인구와 경제를 성장시켜 주고 자유를 확대시켜 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선포의 수사(修辭)는 종교적이었지만, 선포의 동기와 목적은 정치적이었습니다. 링컨의 선포로 추수감사절은 미국의 전통으로 창안되고 미국의 시민종교가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유의 땅’ 미국의 건국신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조지형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