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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6억5000만달러 특급 작전 ‘푸른 다뉴브강’을 열다

입력 | 2013-09-12 03:00:00

메아리 없는 외침 15년… 철의 장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공산국가에 국제학술지를 보냈다. 답장은 아주 드물게 왔다. 극히 일부 국가에서만. 상대방이 곧바로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이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중앙정보부는 계속 문을 두드렸다. 메아리 없는 외침을 15년 정도 계속하던 어느 날, 커튼이 조금 열렸다. 암호명 ‘푸른 다뉴브 강’. 미지의 세계인 공산권과의 수교 노력은 이렇게 시작됐다. 공작원을 포함한 대표단은 아무 보장 없이 헝가리를 방문했다. 빨라야 1, 2년 내에 영사관 개설 정도가 가능하지 않을까. 다뉴브 강의 물결을 바라보며 이렇게 예상했는데….》


최호중 당시 외무부 장관(앞줄 오른쪽)과 호른 줄러 헝가리 외무부 차관이 1989년 2월 1일 서울에서 국교수립의정서를 교환하고 있다. 한국이 공산국가와 맺은 최초의 수교였다. 동아일보DB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가 공산국가에 국제학술지를 처음 보낸 시기는 1972년 초다. 민간의 공산권 접촉을 극도로 통제하던 냉전시대. 중앙정보부는 우편검열부서의 협조를 받아 소련과 동유럽의 여러 국가에 우편물을 발송했다. 한국국제관계연구소가 발간한 '한국국제연구저널(Korean Journal of International Studies)', 한국학술연구원이 만든 '코리아 옵서버(Korea Observer)'였다.

우편물에는 "한국과 학술교류를 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한국에 오라는 초청장을 첨부했다. 이데올로기는 다르지만 서로 이해의 폭을 넓혀보자는 취지였다. '세계의 반쪽'이던 공산국가에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이 우편물을 보낸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는 더더욱.

공산권을 향한 일방적 구애는 19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답장을 가장 빨리 보낸 국가는 유고슬라비아였다. 일주일쯤 뒤면 회신이 왔다. 헝가리와 체코에서는 6개월 정도가 지나서 보냈다. 내용은 비슷했다. 자료를 잘 받았으니 학술교류를 하자는. 소련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중앙정보부가 공산권에 손을 내민 건 한국외교의 지평을 조금이라도 넓히기 위해서였다. 당시 한국과 수교한 나라는 모두 서방국가였다. 변화의 조짐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서독의 빌리 브란트 정부는 1970년에 동방정책을 추진하면서 3월과 5월에 동·서독 정상회담을 열었다. 동·서독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약은 2년 뒤에 체결됐다. 한국정부는 이에 자극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외교정책에 관한 특별성명인 '6·23 선언'을 1973년 발표했다.

언제쯤이면 공산권과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답할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앙정보부 역시 이런 노력이 언제 결실을 맺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박철언 전 대통령정책보좌관(오른쪽)은 헝가리와의 수교 작업에 돌파구를 만들었다. 박 보좌관이 1988년 7월 11일 그로스 카로이 공산당 서기장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 박철언 씨 제공


● 냉전의 벽에 금이 가다

한국인에게 1980년대의 공산국가는 미지의 세계였다. 외교관계를 수립하리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민간인의 공산권 방문은 사실상 힘들었다. 소포를 보내려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두터운 커튼 사이를 일부 기업인이 오갔다.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그중 한명이다. 그는 가방 하나를 들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헝가리에도 발을 디뎠다.

헝가리는 그를 통해 한국에 메시지를 보냈다. '20억 달러의 차관을 주면 한국정부와 수교교섭을 할 의사가 있다.' 한국이 북방정책을 공식표방하기 전인 1988년 3월경이었다. 수많은 나라 중에 왜 지구 반대편 한국에, 민간기업을 통해 제안했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다만 여러 추측이 가능하다.

당시 헝가리는 공산국가 중 개혁개방을 가장 적극 추진하는 나라로 꼽혔다.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민간기업을 활용했을 수 있다. 대우가 이를 간파하고 헝가리에 먼저 제안했을 수도 있다.

국제정세 역시 변하던 중이었다. 공산권의 경제력이 추락하자 여러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념만으로는 먹고살 수 없다, 소련 눈치만 보지 말고 먹고살 길을 찾아야 된다…. 소련이 위성국가를 통제하는 힘이 약해지는 가운데, 헝가리는 소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독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민족도 동양계인 마자르족이어서 한국과 정서가 비슷했다.

1988년 12월 신동원 당시 외무부 차관(왼쪽)이 헝가리를 방문해 호른 줄라 헝가리 외무담당 국무비서(차관)와 대화하고 있다. 신동원 전 외무부 차관 제공


● 부담스러운 헝가리 협상단장

수교교섭의 길은 열렸다. 하지만 좁고 울퉁불퉁했다. 누구도 그들과 외교관계를 곧 맺을 수 있다고 낙관하지 못했다.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실 북방정책담당비서관이던 염돈재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은 "교섭을 잘했을 경우 1~2년 내에 경제관계나 영사관계를 맺을 거라고 내다봤다"고 회상했다. 잘 되도 '반쪽외교'란 말이다.

교섭은 해야 하는데 누구도 헝가리에 가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협상에 성공할 가능성이 낮아보였다. 신변의 위협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헝가리에서 북한요원을 마주칠 가능성까지.

헝가리에 가는 협상단의 단장을 누가 맡아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공식외교 사절이지만 외무부 차관이 나서면 상대방에 이끌릴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왔다. 외교관이 가면 한국이 수교에 적극적이라는 의미이므로 협상이 시작되기 전에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게 된다.

신동원 당시 외무부 차관(왼쪽에서 두 번째)이 1998년 12월 헝가리에서 투자보장협정에 서명하고 있다. 한국은 헝가리와 정식 수교를 맺기 전에 이 협정을 맺었다. 신 차관 오른쪽은 헝가리 재무부 장관. 신동원 전 외무부 차관 제공


다른 부처의 장관을 보내기도 힘들었다. 정부의 목표는 정식 수교인데, 경제기획원 차관이 가면 경제기관의 수장과 경제문제만 논의하다 돌아올 가능성이 컸다. 안기부 차장을 보내면 헝가리 쪽에서 정보기관장을 보넬테니 정보기관간의 대화로만 좁혀질 수 있었다.

관료들은 박철언 당시 정책보좌관을 추천했다. 그는 노태우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 1970년대 초에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측근인 헨리 키신저를 중국에 밀사로 보낸 전례가 있었다. 이를 참고해 박 보좌관을 추천했고, 그가 협상 단장을 맡게 됐다.

● 헝가리에서의 담판


수교 임무는 '푸른 다뉴브강'이라는 암호로 불렸다. 15억 달러 이상의 차관을 주면 수교를 하겠다고 헝가리가 요구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외무부, 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 안기부 직원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그해 7월 '푸른 다뉴브강'으로 떠났다. 노 대통령으로부터 12억 달러까지는 허용해도 좋다는 전권을 비밀리에 위임받은 채….

현지에서 만난 바르타 국립은행 총재와 산도르 데먄 신용은행장은 차관 문제만 거론했다. 수교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했다. 수교문제에 대해 전권을 지닌 마르요이 부수상도 경제협력 얘기만 얘기했다.

한국정부의 전략은 경제협력과 외교관계의 일괄타결이었다. 차관액수는 최대한 줄이고, 반드시 상환 받도록 안전장치를 마련하기로 했다. 헝가리는 많은 차관을 요구하면서 "외교문제는 차츰 생각하자"며 소극적으로 나왔다. 북한을 의식해서였다. 대표단은 그로스 카로이 공산당 서기장 겸 수상을 면담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최후통첩에 나섰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린 한국에 돌아가겠다." 박 보좌관은 협상단원에게 짐을 싸라고 지시했다. 숙소에서 단원들의 방에 전화를 걸어 "이 사람들 돈을 목표로 하니 안 되겠다. 비행기 시간을 알아보라"고 했다.

헝가리가 모든 전화를 도청하리가 생각하고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보따리 싸라"고 구체적으로 말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도청을 피하기 위해 마당 한 가운데서 했다. 진심으로 한국에 돌아가려는 심산은 아님을 박 보좌관 자신만 알았다.


● 피 말리는 협상 과정

엄포의 효과가 나타났다. 헝가리 측은 그로스 서기장과의 면담을 마련했다. 한국의 정부 대표가 처음으로 공산국가의 국가원수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로스 서기장은 "그간의 회담 경과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러나 북한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박 보좌관은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노태우 정부가 추진하는 전향적인 대북정책, 북방 수교 정책의 대강을 담았다. "우리는 이런 선언을 하고 모든 공산권 나라와 친구가 되려고 한다. 북한이 미국, 일본과 관계를 맺는 것도 반대하지 않고 지원한다.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뭐 있느냐…."

그로스 서기장은 공산국가의 수장이지만 개혁개방을 얘기하며 소련으로부터 자유로운 노선을 가려고 했다. 수교를 하겠다는 원칙에 합의하며 "헝가리가 한국과 수교하는 첫 동구권 국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한 달 뒤에 헝가리의 비밀협상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들은 안기부의 안가이던 워커힐 펄 빌라에 투숙했다.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됐다. 피 말리는 과정. 오전 내내 회담을 하고, 점심을 먹은 뒤 오후 2시부터 새벽 3시까지 이야기를 계속했다.

헝가리측의 주요 파트너는 바르타 특사였다. 양국의 역사, 철학, 시(詩)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와중에서 설득을 계속했다. "당신들은 소련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나라 아니냐. 개혁개방을 얘기하는데 경제협력의 첫 규모에 대해 너무 집착하지 마라. 동구에서 가장 먼저 수교하면 경제협력이 활성화돼서 양국의 경제관계에 도움이 된다."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 고성이 오갔다. 한국이 차관 액수를 줄이려 하면 헝가리는 "이제 그만 하자"고 나왔다. 양쪽의 감정이 격앙됐을 때, 최계룡 대우 부사장이 나타났다. 김우중 회장과 함께 헝가리를 자주 오갔던 인물이라 헝가리 수석대표와 친분이 깊었다. 해외에선 '무하마드 최'라는 이름을 별도로 지어서 다녔고, 유쾌하고 입담이 좋다는 정평이 나 있었다. 최 부사장은 헝가리에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 비판여론이 끓다

차관액수는 6억5000만 달러로 합의했다.8월 26일, 한국은 헝가리와 최종 합의서에 서명했다. 정부는 얼마 후 북방정책협의조정위원회 멤버인 장관들의 서명을 받았다. 정상적으로는 회의를 열고 승인을 받아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공산국가와의 첫 수교. 보안이 새거나 시간이 지체돼선 안됐다.

한국이 헝가리에 4년간 차관을 주고 경제협력을 한다는 표현을 문서에 넣었다. 양국의 수도에 영사관계까지 포함하는 상주대표부를 설치하고, 경제협력이 50% 이뤄지면 외교관계를 맺는다는 내용도 담았다. 사인하던 A 장관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수교만 된다면 아깝지 않은 돈이겠지만…. 그런데, 잘 하셔야 합니다."

대다수 장관도 '수교만 된다면 이깟 돈이 문제냐'는 반응이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4435달러. 헝가리(2000달러)에 비해서는 많았지만, 부유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공산권과 교류에 대한 열망은 돈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컸다.

공산권과 관계개선을 하는 과정에서 우방인 미국과 사전협의를 하는 게 도리였다. 한국정부는 민족의 자존감을 지킨다며 협의를 하지 않았다. 정식 발표 48시간 전에 통보했다. 한국에 파견된 미국 정보기관 관계자는 "한국 정부로부터 통보받기 1주일 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 주재 CIA 거점에서 통보받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얼마 후인 9월 13일, 양국은 무역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서울올림픽(9월 17일)이 열리기 나흘 전이었다. 정부는 가급적이면 발표를 좀더 빨리해 공산국가가 서울올림픽에 많이 참여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었다. 하지만 헝가리는 오랜 우방인 북한의 9·9절 행사에 축하사절단을 파견할 예정이었다. 9월 9일 전에 발표하면 사절단의 입장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컸다. 사절단이 귀국한 뒤 발표하길 원했던 헝가리의 입장을 고려해서 9월 13일로 정했다.

여론은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돈 주고 수교를 사왔다, 차관을 줬는데 공산국가 헝가리가 아무런 변화 없으면 어떻게 되느냐, 괜히 미국과 관계만 나빠지는 것 아니냐, 지금껏 해온 반공교육은 어떻게 되는거냐…. 온갖 비판이 일기 시작했다.

정부 내에서도 불만이 나왔다. 경제기획원의 국장급 간부는 관계기관 실무국장급 만찬을 비공식적으로 마련해 청와대의 북방정책이 무원칙하다며 비판했다. 애써 성사시킨 수교합의였지만 안팎으로는 시끄럽고 날선 소리들이 들려왔다. 대통령의 측근을 통해 '밀실외교'를 했다는 비판이 빠지지 않았다.

이를 의식해 폴란드가 수교교섭을 제의했을 때는 외무부가 담당하겠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외무부 차관보가 이끄는 수교 교섭단이 떠났지만 폴란드 입국마저 거부됐다. 결국 이들은 폴란드 정부관계자를 만나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공산권과는 수교는 첫 걸음 자체가 녹녹치 않았다.

한-헝가리 수교의 물밑작업을 주도한 박철언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의 최근 모습. 그는 25년 전 한국정부 대표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의 국가원수인 카롤리 그로스 공산당 서기장 겸 수상을 만났다.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 제공


● 정식 수교를 향해

신동원 외무부 차관은 그해 12월, 헝가리 외무부의 공식 초청장을 들고 떠났다. 국내 언론은 정식 수교를 맺기 위해 헝가리를 방문한다고 대서특필했다. 일행은 오후 3시경 현지에 도착했다. 헝가리 외무부는 이들을 차에 싣고 어딘가로 달렸다. 숙소로 안내하지 않고 외무부 청사로 향했다. 헝가리 외무부 직원 10여 명이 한국 대표단을 맞았다.

호른 줄라 외무담당 국무비서(차관)은 "헝가리 방문을 환영한다"며 입을 열었다. "한국 신문 봤는데 신 차관이 수교를 하러 간다고 돼 있더라. 아직 이야기도 안 끝났는데 그러면 심히 곤란하다, 이걸 먼저 해명하라." 당시 주 헝가리 북한 대사는 김정일의 동생 김평일이었다. 헝가리의 입장이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해명을 잘못하면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라고 할 기세였다. 당시 외무부에서 '신똘똘'로 불렸던 신 차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한국과 헝가리는 체제가 다르다. 한국에는 언론의 자유뿐 아니라 추측의 자유도 있다. 모두 '관측통에 의하면'이라고 돼 있지, '신 차관에 따르면' 또는 '외무부 공보관에 따르면'이라고 나온 기사가 있느냐." 헝가리 외무부는 그제서야 "알겠다"고 했다.

어느 날, 줄라 차관이 신 차관을 찾았다. 밤 9시경이었다. 잠깐 가볼 데가 있다고 했다. 그로스 서기장을 만나러 가는 자리였다. 서기장은 "그간의 이야기를 다 들었다. 두 나라가 협력해서 좋은 성과가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일이 잘 풀렸다.

신 차관은 헝가리에 머물면서 줄라 차관과 가까워졌다. 헝가리가 한국과 수교를 맺으면 한국 대통령을 정식으로 초청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신 차관이 "한국과 수교하는 것에 대해 소련에 양해를 구했느냐"고 물었다. 베테랑 외교관인 줄라 차관은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씨익 웃었다. 이어 "그쪽에서도 다 알고 있다"고 했다.

● 첫 북방외교의 결실

이듬해인 1989년 2월, 한국은 헝가리와 정식으로 수교를 맺었다. 서울올림픽과 더불어 한국의 발전상을 공산권에 알리는 촉매제가 됐다. 온 세계에 화해의 메시지를 전하며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 국제사회에 우릴 각인시킨 계기가 됐다.

박 보좌관은 동아일보 기자와의 통화에서 "헝가리가 뚫리자 체코, 폴란드 등 공산국가와 줄줄이 수교를 맺게 됐다. 노 대통령 재임기간에 39개의 공산국가와 외교관계를 맺었다"고 회상했다.

6억5000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수교할 가치가 있었을까? 당시 주역들은 그렇다고 말한다. 염 원장은 "전체 차관액 중에서 무상지원은 산업훈련생 훈련지원 등 2000만 달러 정도에 불과했다. 연불수출 기금과 전대차관은 우리 상품 수출을 전제로 했기에 전혀 부담스러운 액수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헝가리는 차관을 모두 상환했다.

한국은 수교를 하는 정치적인 소득을 얻고, 수출시장을 확대하는 경제적인 소득을 한꺼번에 얻었다. 한국의 발전상은 동유럽 국가에 큰 충격을 줬다. 이들 국가의 탈 공산 혁명을 촉진시키는 데도 중요한 영향을 줬다고 동유럽 학자들은 여러 논문에서 지적했다.

헝가리와의 수교에는 변화된 국제정세가 도움을 줬다. 1975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결성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가 대표적이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를 포함해 전 유럽국의 대표가 CSCE를 통해 평화와 안전을 보장한다는 대의에 합의했다면서 신 차관은 이렇게 말했다.

"CSCE가 냉전체제를 허무는 시작이 됐다. 유럽이 이렇게 변해가는 데 있어서 선두주자 역할을 한 게 헝가리였다. 이런 국제정세에 발맞춰 헝가리와의 외교관계를 주도적으로 성사시킨 게 한국이다. 한국과 헝가리는 각각 아시아와 유럽에서 외교 다변화에 앞섰던 선두국가였다." 신 차관은 옛일을 회고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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