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주사파 “엘리트 빠져나가고 판단력 떨어진 사람들만 잔류”의회를 이용하는 전술은 볼셰비키부터 내려온 것국보법 두려워 잡아떼지만 ‘주사파’끼리는 서로 통해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 시사프로 ‘논설주간의 세상보기’ 진행
NL(민족해방파)의 주류인 주사파는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에도 용케 잘 버티고 있는 조국(북한)과 수령(김일성)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식량난으로 북에서 탈북자들이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주사파들도 흔들렸다.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했던 홍진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은 “1990년대 중반 탈북자들이 내려와 전하는 말을 듣고 북한의 진실을 아무리 믿지 않으려 해도 안 믿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민혁당은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절대 충성하는 주사파들의 지하당이었다. 지금은 전향해 북한 민주화운동을 벌이는 김영환이 주사파의 원조(元祖)다. 공작선을 타고 북에 가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왔던 김영환은 북한 체제에 회의를 품고 1997년 민혁당을 해산했다. 민혁당의 구성원은 대략 100명쯤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3분의 1가량이 김영환 홍진표 씨처럼 전향을 했고, 나머지는 그대로 눌러앉았다.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 및 북한 주민의 참상을 알고 나서도 완강하게 버티는 잔류 주사파는 오류를 인정할 용기가 없거나 ‘판단력 수준이 떨어지는’(김영환 표현) 사람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민혁당 잔류파들은 심각한 발달 장애를 겪고 있다.
경기동부 RO처럼 130명 정도가 모이면 완벽한 보안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그런데 왜 130여 명이 모인 회합에서 “무기를 준비하자” “국가기간시설을 타격하자” 같은 말이 나왔을까. 영웅심리의 발로이거나 ‘전략전술적 능력 부족’일 것이다. 김영환은 “중국 공산당이나 (소련) 볼셰비키의 경우 엘리트들이 끝까지 남아 있었지만 한국 주사파의 경우 이미 엘리트들이 남아 있지 않아 전략전술적 능력이 너무 많이 떨어진다”라고 말했다(통진당에 참여했다가 분당사태를 겪고 경기동부의 실체를 폭로한 이청호 부산 금정구의원의 책 ‘진보는 죽었다’에서 인용).
김영환은 이석기가 민혁당의 한 분파였던 경기동부 인맥의 시조이고 대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단언했다. 김영환은 김일성 숭배의 오류를 깨닫고 민혁당을 해산한 뒤에 잔류파들이 북한과의 재(再)연계를 요구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종북적 성향이 강해 북한과의 연계를 간절히 바라던 잔류파들은 1998년에 북에서 남파한 공작원을 통해 다시 북과 연계를 갖게 됐다고 한다. 김영환은 “남쪽 주사파도 역량이 매우 떨어지지만 북쪽의 대남 공작기관의 수준도 저급하다”면서 “남쪽에서 합법정당을 추진하는 것은 김일성의 지시로 추진된 일관된 전술이었다”고 말한다.
잔류 주사파들은 외부에서 자신들을 주사파라고 부르면 “보수신문과 국정원의 낙인찍기”라고 발끈한다. 국가보안법을 피하기 위한 잡아떼기다. 하지만 자기들끼리는 술자리에서 “장군님(김정일) 상중에 술을 자제하라”고 말할 정도로 주사파임을 감추지 않는다. 이청호 구의원은 명예훼손 소송이 들어올 경우에 대비해 통진당 모 의원이 했다는 이 발언의 녹음을 확보하고 있다.
비합법 세력이 의회에 진출하는 전술은 블라디미르 레닌 때부터 써먹던 수법이다. 볼셰비키들은 핵심 당원을 두마에 들여보내 국민을 상대로 선전전을 펼쳤다.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의회의 권능과 규칙을 존중하는 의회주의와 달리 의회 전술은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의회를 이용한다. 통진당이 의회에 진출하기 위해 부정선거 폭력 국고횡령을 서슴지 않았음은 비례대표 경선 부정과 분당 사태를 통해 잘 알려진 바다. 잔류 주사파들의 의회 전술을 성공시킨 일등 공신은 야권 연대로 종북 세력을 끌어들인 민주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