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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김지하, 감옥에서 탱크 지나가는 소리를 듣다

입력 | 2013-09-12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110>석방




석방된 후 강원 원주 집 앞에서. 동아일보DB

서울구치소 2층 맨 끝 한 귀퉁이에 김지하의 방이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면 인왕산과 무악재가 훤히 보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얼마 후 김지하는 김재규의 부관이었던 박선호(중정 의전과장)를 교도소에서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김지하는 “그와 운동시간에 만나 몇 마디 인사를 했는데 딱 한마디만 기억에 남는다. ‘(김재규) 부장님이 그(10·26) 며칠 전 미 중앙정보국장을 만났습니다. 반드시 어떤 조치가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어떠한 조치’란 것은 없었고 얼마 후 김재규의 사형 집행 소식만 들려온다.

1979년 겨울 서울구치소는 들떠 있었다. 함께 복역 중이던 민주화 인사들은 통방을 하면서 “곧 전격적인 사태 변화가 온다더라. 내각 명단까지 다 짜고 있다더라. 우리는 곧 석방된다”는 기대감이 팽배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지하의 머리와 마음속은 편치 않았다. 앞으로 이 정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김지하는 지축을 울리는 굉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나중에 소식을 듣고 ‘12·12’(전두환 노태우 등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정말 복잡한 시절이 왔구나. 앞으로는 진정 근본적인 데에 토대를 두고 일을 해야 한다. 전략을 바꿔야 한다. 내가 언제 감옥을 나갈지 알 수 없으나 이제 사상과 이념에서부터 전략까지 전체를 수정해야 한다.”

그는 다시 책에 빠져들었다. 눈은 책을 읽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바깥세상이 진정 그리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새들을 보며 ‘나도 훨훨 날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자유와 해방의 물결 속에 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긴급조치 9호는 해제(12월 8일 0시)됐고 구속 학생들은 석방되어 학교로 돌아왔으며 해직 교수들도 복직했다.

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대 대통령보궐선거를 통해 최규하 대통령이 당선됐다. 국무총리에 신현확 부총리가, 21명의 장관 중 19명이 바뀌는 대폭 개각도 이뤄졌다.

이듬해 80년으로 접어들자 ‘금단의 성역’으로 생각되던 유신 개헌 논의가 정국을 휩쓸었다. 국회에 헌법개정심의 특별위원회가 구성된 것을 시작으로 전국 대도시에서 개헌 공청회가 잇따라 열렸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 기운이 완연해진 80년 2월 마지막 날.

김대중 지학순 주교 등 총 687명의 민주화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복권 조치가 단행된다. 최규하 대통령은 특별담화에서 “국민 화합의 기반을 조성하고 국가 발전의 대열에 공동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결정했다”고 밝혔다.

2월 29일자 동아일보는 ‘새바람 복권정국(復權政局)’이라는 제목으로 ‘2·29 복권’의 의미를 이렇게 보도한다.

‘꽃 소식이 묻어오는 마파람과 더불어 ‘정치’가 풀렸다. 김대중 씨를 비롯한 민주인사들의 복권은 정치 계절의 개막을 의미한다. 다음 대통령 후보로 유력시되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 김영삼 신민당 총재, 그리고 재야의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등이 지난 25일 저녁 인촌기념관에서 회동한 것이 정국 해빙을 예고한 것이라면 ‘2·29 복권’은 대권을 향한 경주의 신호라고도 볼 수 있다. 작게는 신민당 내에서의 대통령 후보 경쟁이 양성화되고 크게는 구체제와 신체제가 정권 다툼의 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되며 정계는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서서히 재편 과정을 밟게 될 것이 분명하다.’

2·29 대상자에서 김지하는 빠졌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자는 제외됐기 때문이다. 그는 실망과 서운함으로 좌절했다.

그나마 감옥살이가 좀 나아졌다는 게 위안이 됐다. 밥도 꼬박꼬박 들어왔고 운동 시간도 한 시간으로 늘었다. 책도 거의 모든 게 허용되었다. 사방벽이 몸을 옥죄는 듯한 환상인 ‘벽면증’도 씻은 듯 사라졌다. 그의 말이다.

“동학사상 생태학 등에 대한 관심과 독서로 나의 영혼은 참으로 바쁘고 바빴다. 감옥이 바로 ‘광장’이었다. 머릿속에서 문득문득 시를 지어 외우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아내로부터 월간지가 들어왔다. 웬일인가 싶어 보니 지학순 주교 글이 실려 있었다. 신군부의 등장에 쐐기를 박고 ‘3김’에게 비판을 가하는 내용이었다. 지 주교는 또 학생들에게는 집단적 행동을 당분간 자제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의 석방은 80년이 다 끝나가는 12월 11일 이뤄진다. YMCA위장결혼사건의 박종태, 기독청년민주화사건의 송진섭,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유인호 등 8명과 함께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는 것이다. 오탁근 법무부 장관은 특별담화를 통해 “새 시대를 맞이하여 그동안 반공법 및 계엄법 위반으로 복역 중이던 사람 가운데 특히 개전의 정이 현저하다고 인정되는 8명을 석방키로 했다”고 밝혔다.

석방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만으로 서른아홉이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74년 4월 구속되어 10개월 만인 75년 2월 석방되었다가 동아일보에 옥중수기 ‘고행’을 연재해 한 달 만에 다시 감옥에 들어온 지 5년 9개월 만이었다.

대학교 때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며 7년 반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스물세 살 때인 1964년 6·3항쟁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와 도피생활을 시작한 김지하, 70년 스물아홉 나이에 ‘오적’을 써서 당대 민중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김지하…. 하지만 그의 20대와 30대 청춘은 고스란히 수배 구속 사형선고 옥살이로 점철됐다.

그가 풀려난 시각은 캄캄한 밤이었다. 구치소 정문을 피해 뒷문과 뒷골목으로 해서 중앙정보부의 일종의 안가 형태인 한 호텔에 도착해 새벽까지 이것저것 당부의 말씀(?)을 들었다. 새벽 먼동이 터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 주교 승용차에 올라탔다. 김지하의 말이다.

“한 잔인지 두 잔인지 주교님이 사주시어 소주를 마시긴 마셨던 것 같다. 무슨 맛이었는지도 기억에 없다. 다만 씁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마루 밑 댓돌과 벽에 쓰인 숫자와 글씨들을 보자 몸과 마음이 따뜻해졌던 일만이 기억에 환하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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