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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적보존회’ 만든 뒤 신라유물 도굴… 희대의 문화재 악당

입력 | 2013-09-12 03:00:00

[돌아온 우리 얼 환수문화재 이야기]<중>잊지 못할 이름, 모로가 히데오




《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제공한 환수문화재 목록을 보면 유독 자주 등장해 눈길을 끄는 이름이 하나 있다.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1954·사진)라는 일본인이다. 환수문화재 중 지정문화재로 등록된 28건 가운데 6건이 모로가에게서 환수됐다. 국보 제124호인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과 제125호 ‘녹유골호’를 비롯해 보물로 지정된 ‘도기 녹유 탁잔’(보물 제453호) ‘경주 노서동 금팔찌’(제454호)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제455호) ‘경주 노서동 금목걸이’(제456호)는 모두 그가 소장했던 유물이다. 얼핏 보면 한국에 문화재를 돌려준 고마운 은인처럼 여겨질 정도다. 》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도기 녹유 탁잔’과 ‘경주 노서동 금팔찌’, ‘경주 황오동 금귀걸이.’ 모두 1966년 환수돼 보물로 지정된 신라시대의 문화재로 모로가 히데오가 경주에서 활동할 때 착복해 소장했던 유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하지만 모로가 히데오는 한국 문화재에 해를 끼치고 도굴을 일삼은 희대의 악당이다. 환수된 문화재도 그가 일본 검찰에 압수당한 것들로, 자칫 딴 곳에 팔거나 숨겼다면 고국 땅을 밟지 못할 뻔했다. 다행히 일본 제실박물관(일본 국립박물관의 전신)이 압수품들을 사들였고, 이를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돌려받았다.

국내에는 그간 모로가가 어떤 인물인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 초대 주임(관장·1926∼1930)을 지냈고 금관총 발굴에 관여했다는 정도만 전해졌다. 하지만 최근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44)가 학술지 ‘대구사학’에 게재한 논문 ‘일제강점기 경주고적보존회와 모로가 히데오’를 보면 모로가가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다.

모로가는 원래 문화재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이였다. 일본에서 서생으로 지내다 1908년 조선으로 넘어와 무역업, 대서업에 종사했다. 하지만 사교성이 좋았던 그는 정관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고 1910년대 경주로 와서 고고학 전문가인양 행세하기 시작했다. 이때 경주의 조선인 유지들을 회유해 만든 것이 ‘경주고적보존회’였다.

보존회란 그럴듯한 이름을 달았지만, 실상 모로가의 막후 조종 아래 도굴과 문화재 강탈을 자행했다. 사천왕사지 서편 목탑을 비롯해 수많은 유적을 마구잡이로 파헤쳤다. 그가 착복한 유물은 엄청났고, 석기 토기 금속제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금관총 출토품은 경주에 별도로 보존했다고 하나, 일부는 모로가가 보존회 차원에서 관리하던 시절 도난당해 사라졌다. 하지만 죄는 조선인들이 뒤집어쓰고 고문까지 당했다. 심지어 모로가는 혹시나 있을 매장 유물을 차지할 욕심에 멀쩡한 첨성대를 해체 보수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너무 많이 착복한 탓일까. 1933년 모로가는 대구에서 파견된 일본 검찰에 전격 체포됐다. 신라 지역에 잇따른 도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것. 고위층과 인맥이 두터웠던 그였으나 일본 측이 봐도 그 정도가 너무 심했던 모양이다.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이 연일 이 사건을 보도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소장품을 빼앗긴 뒤 그해 말 보석으로 풀려난 그는 경북 포항 수산시험장 주임으로 지내다 광복 직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압수된 모로가의 장물이 돌아왔다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는 남아 있다. 많은 유물을 환수하긴 했으나 당초 그가 빼돌렸던 유물이 제대로 다 돌아왔는지 확실치 않다. 정 교수는 “일본은 지금도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의 고고학 연구가 훌륭한 문화정책이었다고 주장한다”며 “하지만 모로가 같은 악질적인 문화 권력자와 유착해 벌인 활동이었음을 (그들은)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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