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한마디에 무너지는 개인 통해 인종-사회 폭력성 고발
필립 로스는 반세기가 넘는 꾸준한 작품 활동을 통해 주체로서의 인간이 타인이나 자연을 지배하려 들면 필연적인 자기파괴로 이어진다고 경고해 왔다. 구글 이미지 검색
1933년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로스는 뉴저지에서 성장해 시카고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군에 입대했다가 부상으로 명예제대한 그는 시카고대 영문학 박사과정에 들어가지만 중퇴한다.
로스는 1959년 단편선집 ‘안녕, 콜럼버스’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접어든다. 수록작 중 ‘신앙의 수호자’가 유대인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유대교 성직자들의 거센 비판을 받지만, 이듬해 이 선집으로 전미 도서상을 수상한다.
로스의 초기작은 미국으로의 이주, 경제적 성공, 미국으로의 동화 과정에서 심화되는 세대 간 갈등 같은 유대인 이민자 문학의 주제를 공유하지만, 유대인에 대한 정형화는 지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선민의식과 선악의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못한 유대계 미국인은 물론이고 유대인에 대한 허구적, 부정적 이미지에 얽매인 다른 미국인을 동시에 문제 삼았다.
로스에게 비평가들의 찬사를 안겨준 작품은 대부분 그가 50대 이후에 발표한 소설이다. 특히 2000년에 발표된 ‘인간의 오점’은 그 대표작으로 꼽을 만하다. 주인공 콜먼 실크는 인종차별 때문에 기회를 박탈당하고 싶지 않아 유대인 행세를 하며 살아 온 흑인이다. 마침내 그는 뉴잉글랜드에 있는 대학의 고전문학 교수가 되어 대학 개혁을 주도하며 학장의 지위에 오른다.
하지만 애써 쌓은 콜먼의 성공과 명예는 무심코 던진 농담 한마디로 무너져 버린다. 콜먼은 강의실에서 결석생들을 지목해 “이들이 실재합니까, 아니면 유령들입니까?”라고 말하는데, 유령(spook)은 과거 흑인을 경멸적 의미로 지칭하는 단어였다. 그 자신이 흑인인 콜먼은 부당한 마녀사냥에 맞서 싸우지만 그 와중에 부인마저 죽게 된다. 콜먼은 37세 연하의 포니아와 사랑에 빠지지만 둘의 관계를 시기한 포니아의 남편이 계획한 자동차 사고로 숨진다.
작가는 결석생이 흑인인 줄 모르고 던진 농담의 맥락이 무시되는 반지성적 사례를 다루는 작업을 통해 1990년대의 정체성 정치와 정치적 공정성 담론의 문제를 드러낸다. 비평가들이 지적하듯 로스의 소설에서 ‘사실’과 ‘소설’, ‘허구’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이 소설도 콜먼의 이웃인 네이선 주커먼이 콜먼의 지인과 가족의 증언을 기초로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 그의 삶을 재구성하는 형식이다.
문상영 박경리문학상 심사위원
○ 문상영 심사위원은…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주립대 영문학 박사. 현재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로 미국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흑인문학과 미국문학의 정전’(2001년)과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에서 흑인문학 전통 읽기’(2003년) 등 논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