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1964∼)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끝났다! 화자의 마음은 멍하니 그 자리에 있다. ‘썩었는가 사랑아.’ 그대, 나를 잊어버렸는가, 이 더러운 사랑아! 화자는 차마 변심한 상대를 욕하지 못하고 사랑을 욕한다. 사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횅댕그렁한 자리, ‘공터’에서 화자는 그대를 잊느라 늙어버렸단다. 그러나 울지 않고 고통을 참느라 환하기까지 하단다! 변한 사랑에 아프고 속이 썩어 문드러져도, 그대를 사랑했던 기억을 잊지 않으리라. 사랑으로 순결하고 환하고 맑았던 나를 잊지 않으리라. ‘공터에 뜬 무지개가/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사랑, 아름다운 신기루이며 허상인 무지개가 다시 공터에 뜬단다. 그러면 화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입술을 더듬고, 말로 못다 한 마음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린단다. 그대를 꿈꾼단다.
이 시는 이성 간의 사랑을 다룬 듯하다. 곤두박질하건 헤어지건 불륜이건, 이성 간의 사랑은 아무리 애달파도 ‘용인된 사랑’이다. ‘용인되지 않은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남의 사랑을 용인하고 말고 하다니, 괴상한 일이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