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 신발 만들며 백정과 어울리던 노비도적토벌 두각 포도대장-재상까지 승승장구
양생은 당시 법대로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어 머슴살이를 했다. 가죽신이 유행하자 양생은 가죽신을 만들어 팔았다. 그는 저잣거리에서 백정을 비롯한 다양한 하층민과 어울렸다. 백정들은 소나 말을 도살한 뒤 얻은 가죽으로 물품을 만들었고, 활을 쏘고 말을 탔기 때문에 무예에도 능숙했다. 양생은 백정들에게 가죽신 만드는 법뿐 아니라 다양한 무예도 배워 훗날 활쏘기와 말타기, 격구에 능했다. 양생은 참판 윤보 집안의 여종을 아내로 맞았다. 학자 성현은 저술 ‘용재총화’에서 양생 부인의 외모에 대해 “추하고 비루하다”고 묘사했다. 게다가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했음에도 양생은 아내를 끔찍이 아꼈다. 훗날 재상이 된 뒤 새 아내를 맞거나 첩을 들이라는 주위의 권유에도 그는 “내가 젊었을 때 빈곤을 같이했는데, 하루아침에 버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거절했다.
신발 장사를 하던 양생에게 혼인은 뜻밖의 전환점이 됐다. 부인의 상전이던 윤보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조카였다. 수양대군(훗날 세조)은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키기에 앞서 측근과 무사, 천인들까지 끌어모았다. 이때 정희왕후 윤씨 집안의 친인척이 대거 참여했고 양생도 수양대군의 시종노비 중 한 명으로 가담했다.
양생은 죽기 두 해 전까지 장장 17년간 포도장을 지냈다. 도적을 잡는 남다른 능력 덕분이었다. 그는 저잣거리에 떠도는 정보망을 적극 활용했다. 옛 백정 친구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상이 된 뒤에도 장터를 지나다 옛 친구를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와 회포를 푼 다음에야 길을 떠났다. 끝내 글을 배우지 못해 더 높은 관직을 얻진 못했지만 그는 의리와 인간미를 갖춘 진정한 조선의 ‘훈남’이었다.
강의=심승구 한국체대 교양교직과정부 한국사 교수
정리=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