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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김순덕]메르켈벨리아니즘

입력 | 2013-09-17 03:00:00


좌파야당이 최저임금제를 약속하자 그는 재빨리 비슷한 공약을 내놨다. 올여름 집값이 치솟으면서 좌파야당이 월세 제한을 들고 나오자 그도 찬성한다고 밝혔다. 보수정당의 대통령후보이면서도 조금씩, 때론 야당이 놀랄 만큼 왼쪽으로 당을 이끄는 여성 정치인.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 같은가. 22일 총선을 앞둔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다.

▷2005년 첫 여성 총리로 취임해 3선이 확실시되는 메르켈의 정치를 메르켈벨리아니즘(Merkelvellianism)이라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誌) 최신호가 소개했다. 500년 전 ‘군주론’을 완성한 마키아벨리의 정치이념 마키아벨리아니즘(마키아벨리즘이라고도 하지만 메리엄웹스터 사전에서 ‘마키아벨리즘’을 찾으면 ‘마키아벨리아니즘을 보시오’라고 나온다) 앞에 메르켈을 붙인 신조어다. 정치는 도덕과 관계가 없다. 이념에 붙들릴 일도 아니다. 설령 안 좋은 수단을 쓴다고 해도 정치적 목적을 이룬다면 정당하다는 마키아벨리아니즘의 메르켈판(版)이다.

▷우리는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명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메르켈이 인기와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리더라고 높게 평가했다. 유럽 최강의 경제, 20년래 최저의 실업률은 기본이다. 수더분하고 검소한 이미지로 ‘재정위기 남부유럽에 내 세금을 퍼붓는 게 아닐까’ 불안해하는 독일인들을 유럽 무대에서 보호하는 모습은 천생 억척엄마다. 선거운동 중 심각한 이슈는 쏙 빼놔 국민을 정치적 무뇌아로 만든다는 비판도 있지만 뭐 어떠랴, 국익과 공동선을 위해서라면.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우리 정치에서 마르크스보다 마키아벨리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정치가 지나치게 도덕적 이상주의에 빠져 있다며 실현 가능한 정치, 결과까지 책임지는 정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공교롭게도 우리에게는 메르켈과 참 닮은 여성 대통령이 있다. 현실정치를 잘 알고 신뢰를 강조하지만, 스스로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국민의 고른 신뢰를 받지 못한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