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힘
추석 극장가는 ‘진격의 한국 영화’가 차려놓은 잔칫상이다. 올해 내내 한국 영화는 고공행진을 해왔다. 벽두부터 1000만 영화 ‘7번방의 선물’이 매진 사례를 낳은 이후, 내내 외화를 주눅 들게 하며 극장가 활황세를 이끌었다. 특히 8월 기세는 폭염보다 뜨거웠다. 봉준호·송강호 콤비의 ‘설국열차’가 관객 900만 명을 돌파했고, 신인감독의 데뷔작 ‘더 테러 라이브’와 ‘숨바꼭질’이 젊은 영화작가의 패기와 하정우, 손현주라는 노회한 배우들의 호연에 힘입어 각각 500만 명을 넘겼다. 이색 소재의 재난영화 ‘감기’도 그 뒤를 따라 300만 고지에 올랐다.
SF에서 액션, 스릴러, 재난 등 장르를 불문하고 한국 영화는 개봉했다 하면 팡팡 터졌다. 이에 힘입어 8월엔 사상 처음으로 한국 영화가 월간 관객 수 2000만 명을 넘어섰다. 앞으로도 각종 기록을 쏟아낼 전망이다. 역대 최초로 연간 관객 2억 명(외화 포함)을 무난히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고, 한국 영화 관객 수도 지난해에 이어 1억 명을 훌쩍 넘겨 역대 최고점을 찍을 것으로 전망된다.
역모의 운명을 타고난 자 누구냐
감독 : 한재림Ⅰ주연 : 송강호, 이정재, 백윤식, 조정석, 이종석, 김혜수
‘송강호 시대도 저물었는가.’ ‘설국열차’ 개봉 전까지만 해도 말 많고 민감한 영화계에서 흔치 않게 돌던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꼭 10년 전 ‘살인의 추억’ 이후 그의 흥행파워가 주춤하면서 전성기가 쇠하는 듯 보였다. 그러는 동안 김윤석이 송강호 자리를 넘어선 듯 보였고, 류승룡이라는 또 한 명의 호랑이가 나타나 포효했다. 하지만 송강호는 세 번째로 짝을 이룬 봉준호 감독의 대작 ‘설국열차’로 세간의 설왕설래를 간단히 잠재웠다.
‘관상’은 당대 최고의 ‘관상쟁이’로 꼽히는 가상의 인물과 조선 전기 정쟁의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계유정난’의 역사적 사실을 결합한 이른바 ‘팩션 사극’이다. 극중 역적 집안으로 몰려 아들 진형(이종석 분), 처남 팽헌(조정석 분)과 산골에 은거하던 천재 관상쟁이 내경(송강호 분)은 한양의 내로라하는 기생 연홍(김혜수 분)의 꼬드김에 ‘집안을 일으키고자’ 장안으로 올라왔다가 서릿발 같은 조정 내 권력투쟁에 엮이게 된다.
병약해 죽을 기색이 역력한 문종은 왕위를 이을 어린 세자(단종)를 걱정해 “역모의 운명을 타고난 자를 가려내고 김종서와 함께 보위를 지켜달라”는 비밀 지령을 내경에게 내린다. 이때부터 ‘호랑이 상’인 김종서(백윤식 분)와 야망으로 가득 찬 피도 눈물도 없는 ‘이리 상’ 수양대군(이정재 분) 사이에 선 내경의 두 눈과 세 치 혀에 조선 국운이 달린다.
‘설국열차’의 남궁민수도 그랬거니와 ‘관상’의 내경 역시 송강호를 위한, 송강호가 아니면 대체 불가능한 역이다. ‘관상’에서 일개 관상쟁이일 뿐인 내경은 당치도 않게 아들을 구하랴, 종묘사직을 지키랴, 역사의 대세를 붙잡으랴, 의리를 지키랴 갈팡질팡하다 험한 꼴이란 험한 꼴은 다 보게 된다.
거슬러 올라가면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은 스크린 전면을 차지한 ‘송강호 얼굴’이었다. 얼굴에 나타난 운명을 소재로 한 ‘관상’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그의 얼굴에서 관상 전문가들은 무엇을 읽었을까. 송강호의 말이다.
“제가 ‘구렁이 상’이라고 합니다. 우리 영화 티저 예고편의 도움을 받았던 관상 전문가가 한 이야기입니다. 짝눈에 구렁이 상은 남을 속이며 살 팔자인데, 마술사나 연기자의 운명이라고 합니다. 제대로 직업을 선택한 셈이죠.”
팔푼이 남편이 비밀요원이라고?
감독 : 이승준Ⅰ주연 : 설경구, 문소리, 다니엘 헤니
전에 없이 출연작 개봉이 몰려 설경구는 올해만 4편으로 팬들을 만나게 된다. ‘스파이’ 개봉을 앞두고 만난 설경구는 “1년에 4편이라니 민망하다”고 말했지만, ‘타워’에 제법 관객이 들었고, ‘감시자들’은 크게 성공했으니 올해도 ‘기본’ 이상을 너끈히 해냈다. 송강호 이상으로 설경구도 올 한 해 수확이 벌써 풍년 예감이다. 각각 1000만 명을 동원한 ‘실미도’와 ‘해운대’를 포함해 ‘5367만 명을 동원한 배우’라고 친절하게 덧붙인 영화사 집계가 아니더라도, 설경구는 최근 전례 없는 전성기를 맞은 한국 영화에서도 타율과 장타력을 모두 갖춘 ‘리딩 히터’임이 분명하다.
‘폭발적 연기’라는 수사가 흔히 따라다니는 설경구이지만 ‘스파이’에선 마음을 비우고 몸도 풀며 액션과 코미디로 구르고 엎어졌다. ‘스파이’는 아내(문소리 분)도 모르게 국가 비밀 정보원으로 일하는 철수(설경구 분)의 좌충우돌 활약상을 담은 첩보 코미디영화다. 설경구는 조직에선 유능한 스파이지만 아내에겐 ‘팔푼이’ 취급을 받으며 고양이 앞에 쥐 신세인 주인공 역을 맡아 문소리와 ‘허당’에 ‘푼수’인 부부연기를 보여준다.
외박과 특근을 밥 먹듯 하는 철수는 테러사건 첩보를 입수해 태국으로 파견된다. 북한 핵무기와 관련한 테러리스트의 준동과 남한에 망명을 기도한 북한 고위 인사 딸(한예리 분)의 납치 사건을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태국에서 낯익은 아내 얼굴이 포착된다. 비행기 승무원인 아내가 출장차 간 태국에서 잘생긴 남자(다니엘 헤니 분)와 만나 놀아나고 있는 것. 그런데 이 정체 모를 남자는 테러 배후에서 모든 사건을 조종하는 인물이다. 아내 구하랴, 외도할까 감시하랴, 테러 해결하랴 철수의 동분서주와 그의 아내 영희의 좌충우돌이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무엇보다 설경구와 문소리의 만남에 눈이 간다. 오래전 영화에서 가슴 미어지는 사랑을 나눴던 둘은 10년 후 능청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중년 부부로 재회했다. 한 촬영 현장에 다시 모이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지만, 카메라보다 가까운 것은 술이었다. 그동안에도 늘 이창동 감독과 문소리의 집이 있는 일산에만 가면 셋이 뭉쳐 소주 한 잔 걸치곤 했다. 틈만 나면 타박하고 짓궂은 수작을 거는 문소리나 이를 태연히 받아내는 설경구. 영화 속 둘의 모습은 술자리 그대로라는 것이 설경구의 전언이다.
영화는 허술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무엇보다 설경구와 문소리의 오랜 인연이 생활처럼 묻어나 빈틈을 메운다. 인상 잔뜩 쓰고 용의자들을 윽박지르는 희대의 캐릭터 강철중도 제 옷이지만, 아내에게 멱살 잡힌 채 허허실실 구슬리는 ‘허당’ 스파이도 설경구에게 썩 잘 어울린다.
한 여자를 바라보는 세 남자의 시선
감독 : 홍상수Ⅰ주연 : 정유미, 이선균, 김상중, 정재영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점점 유들유들해지며, 점점 재미있어지고, 점점 경쾌해지며, 점점 유머러스해진다. 약간 ‘연속극’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 왜냐하면 이어지는 작품에 비슷한 인물과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하고, 같은 배우들이 비슷한 역을 맡아 연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회부터 보면 더 재미있지만, 최근 에피소드 한 편만 떼어놓고 봐도 전혀 문제될 것 없이 즐거움을 준다.
홍상수의 16번째 작품 ‘우리 선희’는 한 여자와 세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 여자는 선희(정유미 분)다. 그녀가 대학 교정에 나타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졸업 후 한동안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지내다 오랜만에 모교를 다시 찾은 길이다. 영화과 졸업생인 선희는 해외 유학을 가려고 최 교수(김상중 분)에게 추천서를 부탁한다. 최 교수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선희를 반가워하면서 “원래 영화 만드는 게 목표 아니냐, 유학은 도피 아니냐, 부딪혀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둥 이런저런 충고를 하지만, 선희는 기어이 유학을 가겠노라고 고집한다.
선희는 최 교수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 우연히 옛 연인인 문수(이선균 분)를 만난 낮술을 마신다. 오랜만에 대작을 한 둘은 취하고, 결국 문수는 여전히 선희를 사랑한다며 주저리주저리 애정고백을 늘어놓지만, 선희는 그를 남겨놓은 채 술자리에서 일어선다. 옛사랑을 다시 만나 감상에 취한 문수는 잘 알고 지내는 형이자 감독인 재학(정재영 분)을 찾아가 또 한 잔을 청한다. 느닷없이 나타난 후배가 귀찮은 재학은 퉁명스러운 태도로 후배의 연애 고민을 들어준다.
한편 다음 날 선희는 다시 최 교수를 찾아가 추천서를 받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성적이며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기표현에 능하지도 못하지만 머리가 똑똑하고 안목이 뛰어나며 이상적일 정도로 순수하다. 언젠가는 숨겨진 재능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요지의 추천서는 도대체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정도다. 선희는 다시 써달라며 최 교수와 술 한 잔을 하게 되는데, 둘 사이엔 사제관계를 넘어선 뭔가 끈끈한 분위기가 흐른다. 여제자의 부추김에 가슴이 설렌 최 교수는 마음 터놓고 지내는 후배를 찾는데, 그게 또 재학이다.
재학은 상대가 선희라는 사실을 모른 채 최 교수의 애정 고민을 들어준다. 그리고 재학은 동네 길에서 우연히 선희를 만나고, “술 한 잔 사달라”는 후배의 청에 반색해 함께 취한다. 역시 선희와 재학의 술자리에서도 선후배관계를 넘는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최 교수와 문수, 재학 사이에서 선희는 서로의 꿍꿍이와 비밀 애정사로 숨겨진 존재가 된다. 모두에게, 각자에게 선희는 그냥 선희가 아니라 ‘우리 선희’다. 선희가 없는 자리, 이 세 명이 함께 모이면 선희에 관한 어떤 말이 오갈까.
홍 감독은 실제 겪었던 몇 가지 일화를 떠올리면서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한 사람에 대한 평판에서) 의견 일치의 경우가 불일치한 의견으로 서로 충돌하는 경우보다 더 위험한 짓거리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린 정리하고 정의하지 않을 수 없지만, 우리의 그런 정의 내리기가 또 우리의 한계가 되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선 우리의 이런 면을 좀 과장되게 드러내 보였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다.
홍 감독의 영화는 늘 시덥지 않고 사소해 보이는 술자리와 만남, 말로 가득 채워진다. 때로 대화는 어색하고 주춤하며 길을 잃기 일쑤고, 특별히 대단한 줄거리랄 것도 없는 일상적인 사건이 연속된다. 하지만 그 틈 사이를 비집고 유머와 아이러니, 그리고 인생의 진실과 성찰이 일으키는 공명이 굉장하다. 무엇보다 홍 감독의 영화는 스크린 속 술자리로 관객을 끌어당기는 마법 같은 힘을 갖고 있다. 스크린 속 그들이 내 옆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나는 태연히 그들의 수작을 바라보는 듯한 경이로운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에도 술집으로 향하게 한다. 그의 영화는 ‘알코올 지수’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경지를 보여준다.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