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지나 저녁 때’
나태주(1945∼)
남의 집 추녀 밑에
주저앉아 생각는다
날 저물 때까지
그때는 할머니가 옆에
계셨는데
어머니도 계셨는데
어머니래도 젊고 이쁜
어머니가 계셨는데
흰 구름은 눈부셨는데
풀잎에 부서지는 바람은
속살이 파랗게
떨리기도 했는데
사람 많이 다니지 않는
골목길에 주저앉아 생각는다
달 떠 올 때까지.
‘동구리 작가’ 권기수 씨의 작품
명절은 가족 화목을 다지는 즐거운 축제의 시간이다. 하지만 그동안 쌓인 가족 불화가 주로 폭발하는 시간이란 것도 새삼스러운 사실은 아니다. 명절 연휴를 앞둔 마음은 반갑고 흐뭇한데 보내고 나면 허전하고 시원섭섭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래도 백발성성한 부모님, 같이 귀밑머리 희어져 가는 형제자매를 보면 꽁했던 마음과 사소한 갈등이 어느덧 한 뼘씩 사그라지기도 한다.
해마다 그랬듯이 집 안 가득 북적이는 가족 친척과 함께 추석 당일을 이집 저집 오가며 분주하게 보냈다. 다음 날은 모처럼 연로하신 친정엄마를 독차지해 단둘이 오붓한 하루를 지냈다. 거동이 불편하신 탓에 바깥나들이는 엄두도 못 내고 저녁 무렵에 아파트 사이로 빠끔히 얼굴 내민 노란 달을 마중한 게 가장 큰 행사였다. 달 보고 무슨 소원 빌었느냐는 딸의 호기심에 “비밀”이라 답하는 엄마의 속내를 어찌 모를까. 팔순을 훌쩍 넘은 노모의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등을 쓰다듬다 나태주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남의 집 추녀 밑에 주저앉아서 할머니도 어머니도 계셨던 ‘그때’를 회상하는 한 남자의 모습에 가슴이 절로 짠해진다. 우리 역시 ‘젊고 이쁜’ 엄마와 함께했던 그 많은 명절을 고마운 줄 모르고 보냈으니, 등 굽은 노모와 맞이하는 추석이 한 해 한 해 더 눈물겹고 애틋하지 않던가.
유난히도 긴 추석 연휴를 보내느라 몸도 마음도 꽤나 시끌벅적했다. 몇 날 며칠 시내를 뱅뱅 돌며 보낸 이도, 가다서다를 반복한 끝에 만난 서울 톨게이트의 불빛에 안도의 숨을 내쉰 이도 이제 아쉽고 섭섭한 마음으로 연휴 마지막 날을 배웅할 때다. 오늘 밤, 새 달 뜰 때를 기다리며 고즈넉한 풍경에 마음 한 자락 기대고 싶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