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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슬픈 취업준비생들 “달력속 빨간날 까맣게 지웠죠”

입력 | 2013-09-22 03:00:00

■ 추석연휴 대학도서관-학원가 풍경




추석 연휴 기간임에도 21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강대의 로욜라 도서관에 나온 학생들이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대기업의 하반기 공채가 한창인데 추석은 꿈도 못 꾸죠.”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대학원생 조모 씨(30)의 9월 다이어리는 빈 공간 없이 하반기 대기업 공개채용 일정으로 빽빽했다. 20개 남짓한 대기업 이름과 서류 마감일, 발표 예정일 등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당장 23일까지 써야 하는 자기소개서만 4개. 조 씨의 다이어리에 공휴일을 뜻하는 빨간 숫자는 모두 검게 지워져 있었다. 조 씨는 “연휴라고 좋아하는 것도 다 취업이란 바늘구멍을 통과한 사람들 얘기”라며 “올해 추석도 도서관에서 보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취업준비생들에게 명절은 특별한 날이 아니다.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나는 것도, 잡채와 갈비찜 등 기름진 명절음식을 먹는 것도 이미 취업에 성공했거나 아직 취업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 얘기다.

본보 취재팀이 추석인 19일 전국 주요 대학 도서관과 학원가를 취재해 보니 취업준비생들이 명절을 반납한 채 취업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각 대학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추석 연휴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 식사를 어디서 해야 하는지 등을 묻는 글이 줄지어 올라왔다.

19일 오후 4시 반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 중앙도서관. 관리실 모니터에 적힌 출입자 수는 348명을 가리켰다. 연휴 첫날인 전날에는 627명이나 도서관을 찾았다. 열람실에는 취업준비생들이 고개를 숙인 채 ‘토익’ ‘9급 공무원시험’ 등 각자 취업에 필요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4학년 김민수 씨(28)는 운동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오전 7시에 도서관을 찾았다. “추석인데 시골에 가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우리 같은 취업준비생들에게 명절은 딴 세상 이야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달 경찰공무원 순경 채용 필기시험을 본 김 씨는 추석을 일주일 앞둔 12일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는 “시골에 가도 친척들이 분명 ‘직장 구했느냐’고 물어볼 텐데 떨어졌다고 얘기하는 것보다 한 글자라도 더 보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하다”고 했다.

도서관 관리인 박모 씨(55)는 “지난해보다 명절에 도서관을 찾는 학생이 많아진 것을 보니 취업이 더욱 어려워진 것 같다”며 “내 아들도 대학 4학년인데 새벽부터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을 보면 아들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 이날 박 씨가 도서관 문을 연 시간은 오전 5시. 1시간도 안돼 20여 명의 취업준비생이 도서관에 들어섰다고 한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 학원가도 취업준비생들로 붐볐다. 고시생들을 주로 손님으로 받는 ‘고시식당’을 포함해 대부분의 식당은 문을 닫았지만 학원 강의실은 평일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W공무원학원에 다니는 박미림 씨(22·여)도 내년 4월 공무원시험 준비로 명절을 반납하고 오전 8시부터 추석단기특강을 듣기 위해 학원을 찾았다. 박 씨는 “남들 놀 때 공부하자는 생각에 학원을 찾았는데 막상 학원에 와보니 추석인데도 평소처럼 학생이 많아서 놀랐다”고 말했다. 박 씨는 이날 편의점에서 3000원짜리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웠다.

취업전문사이트 ‘사람인’이 최근 구직자 700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53.6%)이 ‘추석 연휴 기간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취업 준비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추석 때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은 ‘누구는 대기업 들어갔던데’(25.9%), ‘너 아직도 취업 못해서 놀고 있니’(16.8%) 순이었다.

취업준비생 김모 씨(25·여)는 “친척들이 무심코 던지는 ‘올해는 취업해야지’라는 말이 취업준비생 입장에서는 매우 부담스럽다”며 “취업을 빨리 하는 게 효도”라고 말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15∼29세의 청년층 비경제활동인구는 541만 명, 이 중 취업준비생은 61만4000명이다.

서동일 기자 d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