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정치 안 한다… 죽을 때까지 조선의 사상 연구하다 갈 거다”
다시 만난 김지하 시인은 과거보다는 미래에 대한 구상으로 가득했다. 동학 기독교 불교를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을 해온 그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아우라지 미학’ 연구에 남은 생을 바치고 싶다”고 했다. 원주=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두 번째 전화는 중앙정보부 근무 시절 김지하와 교류해 온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만나 김 시인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내용이 담긴 35회 ‘인연 1’편 때문이었다. 당시 기사는 오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석방된 김 시인이 이 전 원장과 몰래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박정희 정권을 엎자”고 했다는 이 전 원장의 증언을 소개한 것이었다. 김 시인은 “나는 절대 폭력주의자가 아닌데 쿠데타를 운운하며 폭력을 찬양하는 것처럼 비쳤다”고 언짢아했다.
당초 김 시인의 회고록으로 출발한 기획이 ‘시대사’로 넓어지면서 우려됐던 대목은 김 시인이 얼마나 기자를 믿고 맡겨주느냐 하는 것이었다. 물론 당사자의 증언을 충실하게 전달하긴 하겠지만 생존해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기사를 쓴다는 것은 당사자의 절대적인 양해 없이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연재가 가능했던 밑바탕에는 전적으로 기자를 신뢰해준 김 시인의 대인적 풍모에 있다. 그는 “나 말고 여러 사람을 부각하는 쪽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큰 틀에서만 기획 방향을 주문했을 뿐 이렇게 써 달라, 저렇게 써 달라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앞에 소개한 두 번의 전화 말고는 연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아예 연락이 없었다. 간간이 기자가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관 이사장을 통해 근황을 전해 듣는 정도였다.
이달 16일 강원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다시 만난 김 시인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추웠던 2월 원주에서의 여러 날에 걸친 장시간 인터뷰 후 7개월 만에 다시 보는, 오랜만의 재회였다. 기자의 마음도 그동안 그의 마음에 놓였던 무거운 돌덩어리가 이제는 사라진 것이 아닐까 생각되어 덩달아 밝아졌다. 김 시인은 소회를 묻는 기자에게 “수고했다”는 말로 입을 떼며 이렇게 말했다.
“무엇보다 지난 몇십 년 동안 한국 사회를 갈라놓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융합하기 어려운 갈래 길이 파쟁(派爭)의 역사 안에서 ‘중심 모리’를 잡았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원수 관계를 묶어놓은 것이다. 그동안 아무도 누가 그것을 집어 올리지 못했다… 사실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것이 쉽게 합의가 안 된다. 이번 기획은 그걸 찾자고 한 거다. 그리고 딱 찾았다! 도달했다! 나는 미학자이다. 우리나라는 문화 민족이고 문화가 핵심인 나라다.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모순되는 가치 사이에 (이번 연재를 계기로) 적분(積分)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게는 이제부터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일, 내 역할, 사명감을 주었다. 또 과거 산업화와 민주화 중간에 융합할 수 있는 논리를 발견하지 못한 50, 60대에게 방향을 주었다. 새로운 가치관이 발견되고 가능성이 움직이는 시작을 했으니 실로 의미가 크다. 동아일보가 큰일을 했다.”
그는 특히 육영수 여사나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 같은 여성들을 부각한 데 대해 큰 의미 부여를 했다.
“그야말로 음(陰)의 시대, 여성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독자들이 느끼게 해주었으리라 본다. 지금의 시대정신을 잘 반영한 것이다. 역사가 해(태양) 중심에서 달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불보다 물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는 시기다. 내가 너무 꿈을 크게 꾸는지 모르지만 박근혜 대통령 다음이 어떻게 되느냐가 중요하다. 향후 15년은 여성들이 더 발전해서 남성들이 보조하고 그랬으면 좋겠다.”
“사사건건 대통령에게 책임지라고 내몰고 있는데 국민 눈에는 트집으로 보인다. 혹시 대통령이 여자라고 무시하는 건 아닌가. 일이 터질 때마다 대통령보고 책임지라 하면 어떻게 하나.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에게 그런 법은 없었다. 야당이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오히려 대통령한테 이득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정치를 잘하고 있다”고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하고 있다. 야당이 거세게 야단스럽게 해도 담담하게 대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대통령 지지율이 높은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도 20대에서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 봐라. 간단하지 않다.” 그는 “특히 개성공단 문제를 잘 풀었다”고 했다.
“북한은 굉장한 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손을 든 거다. 개성공단 처리하는 것을 보고 대통령이 정치를 잘하는구나 생각했다.” 이어 “늘 그렇듯 태풍의 시작은 미풍”이라면서 북한의 변화에도 주목하고 있었다.
“14일 북한에서 열린 아시아역도대회에서 분단 후 최초로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연주됐다. 이것은 어떤 징조다. 평양신문들이 눈이 둥그레졌다. 한번 지켜보자.”
“사실 우리로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사건이다. 터질 게 터진 거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면 80년대에 주사파 아들딸을 데리고 있는 부모들이 (모친) 박경리 선생을 찾아와서 힘들게 공부시킨 애들이 설악산이나 지리산 가서 ‘훈련’ 같은 것을 받고 오더니 이상해졌다며 미치겠다고 통곡을 했다. 그리고 91년 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질 때 박홍 신부가 학생들을 돌봐주지 않았나. 그때 학생들이 고해성사하면서 주사파의 실체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는 그들이 움직이는 판이 다 보인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그때보다 더 나쁜 것은 가난한 시대에 투쟁할 때는 청신(淸新)한 기운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돈맛, 권력맛을 알아서 부패의 기운이 흐른다. 한마디로 ‘더럽게’ 움직인다.”
지금은 아우라지 미학에 몰두중
김 시인이 말을 받았다.
“내가 대학 다닐 적에 나이 든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를 여러 명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마르크스를 읽으면서도 제대로 공부를 하고 조국의 운명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들이다. 이 들은 사람을 대하는 기본자세가 된 사람들이었다. 저렇게 경망스럽지 않았다. 80년 말 감옥에서 나온 뒤 나는 정치하고는 손을 끊었다. 후배들에게 ‘너희들이 잘해라. 쉬운 쪽만 가지 말고 어렵더라도 공부를 좀 하라’고 했지만 내 말을 따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가 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이석기가 잡혀갈 때 ‘야 이 도둑놈아!’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걸 본 누리꾼들이 ‘경찰관이 이석기 지갑을 빼가서 소리친 것’이라고 놀리더라는 대목을 전해 들었다. 그야말로 놀림감이라는 거지. 이정희는 또 뭔가. 총 얘기가 농담이라고? 총이 사람을 죽이는 건데 농담이라고? 이 사람들은 도무지 뭐가 뭔지 제멋대로 떠들어댄다. 이게 그들의 결말이다.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내 전공이 미학이니까. 요즘 난 공부밖에 안 한다. 정치는 절대 손 안 댄다. 강원 정선에 아우라지가 있다. 내가 지금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우라지 미학’이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아우른다는 뜻이다. 아우라지가 있는 행정구역 이름이 정선군 여량면 여량리이다. ‘여량(餘糧)!’ 여기서부터 출발이다.”
지난 30여 년 동학, 기독교, 불교를 넘나들며 한국의 사상을 융합하는 노력을 해온 그는 한번 말문이 터지면 종횡무진 주제를 넘나들어 때로 따라잡기가 힘이 들 정도다.
“여량으로부터 출발하겠다”는 말의 의미를 묻자 대뜸 “마르크스의 잉여론이 뭔 줄 아느냐” 되물으며 입을 뗐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가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잉여에서 발생한다. 노동에서부터 농산물의 생산과정 전체에서 남는 이익이 잉여, 나머지가 자본이 돼서 돌아오는 과정, 그 과정에서 노동의 주체인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거냐 아니면 중간에서 누가 빼 먹느냐 이 문제뿐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물질적인 기초는 잉여다. 잉여가 바로 미의 시작이다. 창조경제라는 것도 다 똑같다. 여량이 뭐냐, 남는 곡식이란 뜻 아니냐. 그런데 단지 남기는 게 아니라 애당초부터 떼어놓은 것이다. 밥 먹고 남은 곡식이 아니라 밥 먹기 전부터 조상이나 하느님에게 바치기 위해서 떼어 놓은 곡식, 바로 이 여량의 정신이 미의 정신이다. 다시 말해 ‘나머지’로 아름다움이나 문화를 하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그는 “나는 미학자로서 여량을 찾을 것”이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연재를 계기로 조국 더 사랑하게 돼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냐?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스라엘을 두고 ‘성배의 민족’이라고 말한 루돌프 슈타이너(인지학의 창시자인 독일계 오스트리아 학자)의 말을 전하고 싶다. ‘성배의 민족’이란 문명의 큰 변동기에 작은 민족이 나와서 가는 길을 제시하는 민족이라는 뜻이다. 로마라는 큰 체제 밑에 바로 그 작은 민족이 이스라엘이었다. 지금 미국이라는 큰 체제 밑에 있는 한반도가 바로 ‘성배의 민족’이다. 우리는 비록 강대국은 아니지만 내적(內的)인 민족이다. 세계가 지금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민족인 것이다. 백범 김구가 해방된 뒤 들어와서 ‘지금 이 나라 형편에서 어떤 힘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물음에 뭐라고 했는 줄 아나. 군사력, 경제력이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문화력’이라고 했다. 나는 세월이 갈수록 그 말의 의미가 심장해짐을 느낀다. 최근에 중앙아시아에 가서 실크로드 탐사를 하고 온 교수 한 사람 말이 지금 중앙아시아는 한류로 난리라고 하더라. (드라마) ‘대장금’에서부터 (싸이의) ‘말춤’까지 휩쓸고 있다면서 말이다. 앞으로는 문화가 밥을 먹여줄 것이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는 이렇게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번 연재를 계기로 나는 조국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민주화와 산업화의 합의가 이뤄지면서 내가 하던 일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하던 일하고 같은 가치관 위에 서기 시작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두 ‘시대’가 한 것이라고 본다.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조선의 사상을 연구하다 갈 것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걸며 치열하게 ‘그의 시대’를 살아온 이 민주화의 영웅은 다시 또 새로운 생각으로 자신의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민족이나 애국심 같은 단어들은 여느 곳에서 느낄 수 없는 무게감이 있다. 세속은 돈과 싸움으로 정신이 없는데 순수한 열정으로 애국심을 말하는 그를 만나고 오면 늘 내 정신도 다시 무장이 되는 느낌이다. ―원주에서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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