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서 낭만에 젖다가, 정원박람회장 야경 보고 ‘번쩍’
거북선 머리의 기관차에 학 그림을 씌운 객차 5량의 S트레인이 이제 막 고개를 숙인 벼로 인해 황금옷을 입기 시작한 전남 화순군 춘양면의 평야를 경전선 철길로 한가로이 가로질러 달리고 있다. 남도해양관광열차인 S트레인은 27일부터 매일 두 편이 두 노선을 한 번씩 왕복 운항한다. 박준규 철도여행전문 프리랜서(‘대한민국 기차여행의 모든 것’ 공동저자) 제공
내일(27일) 광주와 부산에선 이 가을을 전설로 만들어줄 새 기차가 가을 속으로 첫 여행을 시작한다. 남도의 동서, 영호남을 잇는 구성진 기찻길 경전선(경남 밀양시 삼랑진역∼광주송정역·300.6km), 거길 달릴 ‘남도해양관광열차’ S트레인(S-Train)이다. 이 기차라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아니면 일주일 내내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도 곳곳 역을 내키는 대로 오르고 내리며 발길 닿는 대로 뚜벅거릴 수 있다. 이 열차엔 그런 패스까지 마련됐다.
그리고 또 하나. 거기엔 전 세계 어느 열차에서도 볼 수 없는 다실(茶室)이 있다. 신발 벗고 오른 평상에 양반다리하고 앉아 팽주(烹主)가 우려내는 향기로운 녹차를 노랗게 벼 익는 황금들녘의 차창 풍경을 배경으로 맛볼 수 있는 힐링과 치유(治癒)의 공간이다. 가족이, 커플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여행할 좌석도, 내내 내 발이 될 자전거를 안전하게 보관해줄 거치대는 물론이고 남도의 맛깔스러운 음식을 담아 도시락으로 낼 카페도, 여행에 활기를 불어넣을 다양한 이벤트가 벌어질 칸도 따로 있다. 그 S트레인과 그 기차로 찾은 남도의 여행지를 소개한다.
오전 7시 55분 광주송정역. 붉은 악마 심벌로 친근한 치우천왕의 얼굴을 정면에 그려 넣으며 기관차 전체를 거북선 형상으로 치장한 S트레인이 학(鶴)을 그려 넣은 객차 5량을 끌고 출발한다. 목적지 마산까지는 212.1km, 소요 시간은 5시간 반. 이 기차가 이렇듯 느린 데는 이유가 있다. 경전선의 일부 구간이 아직도 개통 당시 그대로-복선전철화가 되지 않아-여서다. 심지어 어떤 구간에선 시속 30km까지 떨어진다. 그럼에도 S트레인에선 그게 흠이 아니다. 오히려 자랑거리다. 경치를 즐기는데 굳이 빨리 달릴 이유는 없잖은가. 승객은 모두 그 느림을 원한다. 그래서 이들이 타고자 한 건 기차가 아니다. 느림이다.
경전선은 수도권 시민에게 무척 낯선 철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경상도와 전라도를, 그것도 남쪽에서 잇다 보니 부산∼광주를 오갈 경우가 아니라면 평생토록 타 볼 기회를 갖지 못할 루트다. 그러니 여행의 즐거움 측면에서 조명받지 못한 건 당연하다. 거기에 산재한 다양한 여행지의 매력과 진가도 더불어. 그런 면에서 S트레인은 큰 의미를 지닌다. 대한민국 관광의 지평을 또 한 번 활짝 열어주는 효자 역할을 하게 돼서다. 그건 여행전문기자인 내게도 같다. S트레인 덕분에 나주(전남)를 10여 년 만에 다시 찾게 된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여행기자는 늘 새로운 여행지를 찾아 떠난다. 그게 뉴스(News)여서인데 그러다 보니 한 장소를 두 번 찾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런데 S트레인이 나주 땅을 지나게 됐고 그 남평역(전남 나주시 남평읍 동촌로)에 내린 김에 다시 나주를 찾게 된 것이다.
남평역은 ‘아름다운 간이역’의 대명사로 철도여행자에게 잘 알려진 명소. 1930년 경전선 개통 당시 생겼는데 아쉽게도 현재 역사는 1979년 신축 건물이다. 그렇긴 해도 모임지붕의 아담한 역사에선 철도 특유의 낭만이 느껴진다. 그리고 철길 가에선 여길 거쳐 간 역무원이 83년 동안 한결같이 가꿔온 자그만 정원이 승객을 맞는다. 거기엔 길이가 100m쯤 되는 동그란 철길에 레일 바이크(무료)도 있다. 이제 코스모스가 만발하면 역구내 철길은 온통 꽃동산을 이룰 것이다. S트레인이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꽃 무리의 환영인사를 받으며 이 역에 들어설 모습에 가슴이 설렌다.
득량역 ‘추억의 거리’ 타임머신 타고 옛날로
세계 최초로 S트레인에 모습을 선 뵌 다례실.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기차가 득량역에 섰다. 17분간의 짧은 정차인데 역 앞 ‘추억의 거리’를 둘러보라는 배려다. ‘양곡을 얻다’는 풀이의 득량(得糧)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이곳 비봉리 선소 앞섬에서 왜군과 대치하던 중에 바닥난 군량미를 이 선소에서 충당해 왜군을 물리친 후 붙여졌다고 한다. 추억의 거리는 여느 시골 역에서 만나는 평범한 거리였다. 1970년대 지어진 듯한 건물은 하나같이 낮은 지붕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게다가 실내는 누추하고 겉보기마저 허름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다른 시골과 달랐다. 방문객이 있다는 것과 ‘추억’이란 이름 아래 모든 게 현재진행형이란 것이다.
1980년대 초기 컬러TV에선 멀쩡하게 드라마가 방영됐다. 옹색한 다방 안에선 손님들이 처녀 모습 문주란(대중가요가수)의 얼굴이 담긴 앨범재킷 앞에서 30년도 더 된 선데이서울(주간지)을 읽으며 매실차를 마신다. 만화책방도 같다. 그 옛날 그 만화책으로 채워졌다. 문구점엔 쫀드기 등 추억의 군것질거리가, 술가게엔 지난 60년간 생산된 진로 무학 경월 한일 등 다양한 옛 지방소주가 전시돼 있다. 일부러 만든 초등학교 교실은 타임머신 격이다. 갈탄난로 위에 양은도시락이 켜켜이 쌓여 있다. 그 옆엔 1967년 문을 연 이발소. 여전히 7공병학 씨(65)가 낡은 의자에 손님을 앉히고 머리를 깎고 있다. 그 앞 담장을 보자. 대형 벽보가 붙어 있는데 1969년 7월 25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개헌에 대한 소신과 입장’이란 특별담화문이다. 이 모두가 ‘추억의 거리’에서 체험하는 짧은 시간여행을 실감으로 이끈다. 모든 것은 이발사 공 씨의 아들 공주빈 씨의 아이디어.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해온 문화디자인 프로젝트 중 하나다.
하지만 내겐 또 다른 계획이 있었다. 10월 20일 폐장할 순천국제정원박람회장의 야경 감상이었다. 순천만 생태공원의 갈대밭 산책과 낙조 감상이란 순천의 명물에 호수정원의 밤풍경이 또 하나 추가되었기에 그걸 확인하기 위해 찾은 것이다. 그런데 정원 야경의 아름다움은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호수와 정원과 조명의 조화를 이 순천에서 찾음이란 예상치 못한 소득이었으니 S트레인에 고마울 따름이다. 정원박람회장은 폐장 이후에도 계속 순천의 정원으로 남게 된다.
■Travel Info
남도의 맛갈진 음식으로 한상 가득한 순천 대원식당의 상차림.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