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택균 문화부 기자
17년 전 봄 2학년 첫 설계수업 날. 입학하고 한 해 동안 고색창연한 교양수업과 줄긋기 연습에 지쳤던 마음이 모처럼 다시 설렜다. ‘이제야 본격적으로 시작이구나.’ 배정받은 분반 담당강사로 초빙된 설계사무소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가 처음 한 일은 자기소개가 아니었다. 딸깍, 칙, 후우. 실습실은 곧 연기로 자욱해졌다. 고대했던 첫 실습수업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연신 바닥에 재를 떨던 그의 손가락 동작만 선연하다.
12년 뒤. 그럭저럭 호감을 갖고 있던 여배우와 신작 영화 관련 인터뷰를 하게 됐다. 삼청동 카페에서 인사를 건네고 마주앉았다. 섹시한 자태에 살짝 콩닥거리던 마음은 바로 다음 순간 가라앉았다. 딸깍, 칙, 후우. 30여 분 동안 네 개비의 꽁초가 눈앞에 짓이겨져 쌓였다. 그 뒤로 그가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마다 생각한다. ‘한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줄담배 피워대던 여자.’
공연 분야 취재를 시작한 뒤, 무대 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흡연하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대극장은 물론이고 환기구 하나 눈에 띄지 않는 지하공연장에서 담배를 피워 문 채 등장하는 배우가 허다했다. 공연계 종사자들은 그런 모습을 이상히 여기는 시각을 놀라워하는 듯했다. “아무도 그런 걸 지적하지 않는데, 늘 그래왔는데, 왜 그런 사소한 문제를 비판하는가요.”
취재를 계속하려면 어쨌든 참아야 한다. 훗날 다른 업무를 맡게 된 뒤에도 ‘늘 그래온 관습’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관객으로서 다시 공연을 보러 가고 싶어질까. 쾌적한 공간을 즐기며 경험할 만한 콘텐츠. 쌓이고 쌓였다.
사실감을 위해 흡연이 필요하다는 설명, 동의하기 어렵다. ‘배우가 입에 문 것이 전자담배인 듯 보여서 극의 사실감이 떨어진다’고 불평할 관객이 있을까. 그게 어렵다면 매표소 앞에 안내문 정도는 붙일 수 있을 거다. ‘극 진행에 꼭 필요한 까닭에 공연 중 일부 배우들이 잠시 실제로 흡연을 합니다’라고. 나서서 이야기하기는 어색해서 수많은 비흡연자가 객석에 앉아 그저 묵묵히 참는다. 한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무대 위에서 재를 떠는 손가락. 학생들을 내려다보며 강단에 재를 떨던 17년 전 설계 강사의 손가락과 꼭 닮았다.
손택균 문화부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