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커스, 나치에 협조 안해 갇혀… 지로는 전쟁 기여 자부심
독일 데사우 후고 융커스 기술박물관에 전시된 여객기 ‘융커스 JU52’의 모습. 인근 주민들에게 이 박물관은 사랑방 역할을 한다. 주민들은 JU52를 “평화를 사랑했고 나치에 맞섰던 천재 발명가가 남긴 아름다운 비행기”라고 설명했다. 데사우=이진석 기자 gene@donga.com
일본 가수 아라이 유미(荒井由實)의 구슬픈 음색과 함께 흘러가는 신작 애니메이션 영화 ‘바람이 분다’가 이달 5일 국내에서 개봉됐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25일 현재 누적 관객 10만5000여 명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둔 채 전국 대부분의 영화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이 영화가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72)의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의외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반응은 뜨겁다. 13일까지 810만 명이 이 영화를 봤다. 이달 중 1000만 명을 넘을 것으로 보인다.
항공기술의 눈부신 발전. 그 이면에는 전쟁의 역사가 있다. 영화 속 지로는 비행기를 향한 순수한 열망만을 간직한 청년이다. 독일 ‘항공산업의 아버지’ 후고 융커스 박사(1859∼1935)는 작품 속에서 지로에게 경종을 울린다. “전쟁은 어리석다. 독일도 일본도 파멸로 치닫는다.”
지로와 융커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일본과 독일의 항공기술 발전을 이끈 두 인물은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자신이 만든 항공기가 폭탄을 싣고 전장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후세는 이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반전 끝 비극적 최후 맞은 융커스의 삶
독일과 일본의 항공산업을 대표하는 인물인 후고 융커스 박사(왼쪽)와 호리코시 지로의 생전 모습.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상반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융커스 박사의 두상(頭像) 뒤에 놓인 은빛 ‘JU52’가 완벽한 상태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JU52는 여객기로 개발됐지만 2차대전 발발 후에는 독일 공군의 폭격기로 바뀌어 폭탄을 실어 날랐다. 아돌프 히틀러도 JU52를 전용기로 사용했다. 전시된 기체는 여객기다.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 최초로 상용화된 금속제 여객기 ‘F13’의 복원작업이 한창이었다.
박물관은 융커스 박사가 생전 개발한 다양한 발명품도 전시하고 있었다. 융커스사(社) 로고를 단 냉장고나 난방기구 같은 가전제품도 있었다. 융커스사가 전쟁이 끝나고 항공사업에서 철수한 뒤 만든 제품들이다. 박물관 안에서 나치의 흔적이나 전쟁의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박물관은 융커스 박사에 대해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나치 정부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택 연금되어 있던 중 세상을 떠났다”고 기록했다. 나치는 1933년 융커스사의 경영권과 기술 특허를 몰수했다. 1934년에는 국가반역죄로 융커스 박사를 체포했다. 나치에게 항공기술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도주했다 가택 연금된 융커스 박사는 이듬해 2월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제로센은 영광의 기록이다”
영화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지로(위 사진)는 극 중에서 전쟁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비행기 개발에만 매달리는 순수한 기술자로 비쳐진다. 그가 안타까움을 나타내는 유일한 장면은 가미카제 특공대의 전멸을 보며 “한 대도 돌아오지 못했다”고 읊조리는 모습(아래 사진)뿐이다. 대원미디어 제공
일본 도쿄 지요다 구 왕궁(황궁) 인근에 있는 야스쿠니신사. 호리코시 지로가 개발한 전투기 ‘제로센’은 야스쿠니의 전쟁박물관 ‘유슈관’ 1층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유슈(遊就)는 ‘고결한 인물을 본받는다’는 뜻이다. 벽에는 폭탄을 채운 제로센을 타고 자살공격에 나섰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의 유언이 걸려 있다. 간신히 비행기를 띄우는 법만을 배운 어린 군인들은 “전쟁에서 죽으면 신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두려움을 지우려 했다.
‘바람이 분다’ 속 지로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 채 오롯이 비행기 제작에만 매달리는 엔지니어다. 실제 인물은 전쟁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생전 그의 생각은 자서전 ‘제로센, 그 탄생과 영광의 기록’(1970년)에 남아있다.
자서전의 내용은 기술자의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지로는 자신이 반생을 바친 제로센을 “연합군에게 공포와 경외의 대상이었던 전투기”라고 치켜세웠다. 기초기술도, 자원도 없던 상태에서 일본 해군이 요구한 비행속도를 내기 위해 안전을 포기하고 강판 두께를 최소한으로 낮췄다는 일화도 있다. 중일전쟁과 2차대전에서 제로센이 거둔 전과는 그에게 “영광의 기록”이었다.
그가 수석 엔지니어로 일했던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의 얘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유일한 회한은 가미카제 특공대에 대한 짧은 언급이다.
“일생을 통틀어 가장 상심했던 일은 자살특공대였다. 일본은 왜 이길 수 없는 전쟁에 뛰어들어 그런 식으로 제로센을 썼던 걸까…. 물론 당시에는 공공연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
지로와 융커스 박사는 얼핏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린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로의 자서전에서는 전쟁에 대한 죄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일본군의 요청에 기대를 넘어 부응한 것은 물론 자랑스럽게 여겼다. 전쟁 후에는 전투기를 더 만들 수 없게 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죽는 순간까지 나치와 대립했던 융커스 박사와 대비되는 대목이다.
지로는 1945년 8월 15일 ‘종전일기’를 남겼다. “비행기를 더이상 만들 수 없다는 것 말고는 내일부터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모른다”고 적었다. “부족한 외교력이 전쟁의 원인은 아니었는가”, “일본에 파멸을 불러일으킨 정책지도자들은 모두 사라져야 한다”라고도 썼다.
그저 일시적인 감정의 흔들림이었을까. 전쟁 후 지로는 미쓰비시중공업 기술고문으로 남았다. 1973년 일본 국민에게 주어지는 최고 훈장인 ‘욱일장’을 받았다. 제로센의 개발 노하우는 일본 최초의 제트전투기 ‘F86F’와 현재 일본 자위대의 주력 전투기인 ‘F15J’의 밑거름이 됐다. 지로는 은퇴 후 일본 사관학교 격인 방위대에서 교편을 잡다가 1982년 1월 노환으로 사망했다.
‘제로센 열풍’의 모순
일본 도쿄 야스쿠니신사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제로센’은 언제라도 날아갈 준비가 된 듯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제로센은 일본 군국주의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야스쿠니신사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캡처
일본인들은 ‘제로센 열풍’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후지와라 기이치(藤原歸一) 도쿄대 정치학과 교수는 ‘바람이 분다’를 본 뒤 “전쟁의 현실과 분리해 비행기의 아름다움에만 빠지는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다”고 했다.
최근 은퇴를 선언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나 스스로도 어릴 적부터 줄곧 전투기를 동경했으면서도 전쟁을 반대해온 모순을 갖고 있다”면서 “제로센은 패전 후 유년기를 보낸 이들이 갖고 있는 콤플렉스의 집합체”라고 밝혔다. ‘바람이 분다’를 통해 이러한 모순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종전 후 독일과 일본의 항공산업은 각자 다른 길을 걸었다. 융커스사는 1969년 독일 군수업체 MBB에 인수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연합군으로부터 군수품 생산중지 명령을 받았던 미쓰비시중공업은 1952년 전투기 개발을 재개했다. 미쓰비시는 로켓을 비롯한 신무기 개발에도 나섰다. 14일 발사에 성공한 고체연료로켓 ‘엡실론’ 개발에도 참여했다. 고체연료로켓 기술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도 활용될 수 있어 주변국은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땅으로 추락해 산산이 조각난 제로센은 그리스 신화 속 이카로스를 닮았다. 날개를 얻은 이카로스는 태양을 향해 날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일본에서 불고 있는 우경화의 바람은 인간이 다가가선 안 될 곳으로 또 다른 제로센을 날게 할지도 모른다. 다시 바람이 분다.
데사우·도쿄=이진석 기자 gen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