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과 학문토론한 서얼출신 대학자… 김장생-송시열에 영향
그런 그는 왜 이이나 성혼에 비해 덜 알려졌을까. 미천한 신분과 부친의 잘못이 결정적 이유였다.
젊은 시절 송익필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친할머니가 서녀(첩이 낳은 딸)라서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다. 결국 27세 무렵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경기 파주의 구봉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겨 학문에 전념했다. 이 즈음 김장생을 첫 제자로 맞았고, 30대에는 이이, 성혼과 학문적 토론을 이어갔다.
그런데 송익필은 50대에 노비가 되어 도망자로 숨어사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이 저지른 잘못이 발단이었다.
판관 송사련은 1521년 모반 사건을 조작해 중종에게 고발했다. 좌의정을 지낸 안당의 아들인 안처겸이 “간신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모의를 했다는 것. 이 밀고로 안당과 안처겸 안처근 형제는 처형되고 안당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밀고의 대가로 송사련은 당상관으로 초고속 승진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생을 마쳤다. 송사련이 안당 집안 노비의 후손이기에 노비가 주인집을 배신한 것과도 같았다.
안씨 집안 사람들은 60여 년 전에 일어난 이 밀고가 잘못됐음을 밝히고 송익필 가족이 안씨네 노비였음을 입증하는 소장을 냈다.
송사련과 송익필 2대에 걸쳐 양인 호적을 인정받았음에도 송익필과 그의 형제, 자손들은 노비로 환천(還賤)되었다. 안씨네 노비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송익필 가족은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강의=정재훈 경북대 사학과 교수
정리=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