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배우 이순재 최불암-유진룡 장관 ‘한드’ 좌담
26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원로배우 최불암, 이순재 씨와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왼쪽부터). 세 사람은 한국 드라마가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전제작 시스템 도입 같은 제작환경 개선을 통해 질적 성장을 이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한류의 시작은 이순재 씨가 출연한 ‘사랑이 뭐길래’가 중국에 방영된 1997년으로 본다. 그 후 많은 변화가 있지 않았나. 좋은 점도 있지만 걱정되는 부분도 많다.
▽이순재=‘꽃보다 할배’ 촬영차 스위스에 갔는데 그곳에 온 중국 대만 관광객이 우리를 알아보더라. 요즘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는 젊은 스타의 일본 팬들이 몰려온다. 전에는 없던 변화다. 다만 우리 드라마가 질적으로도 발전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른바 ‘막장’이 난무하고, 일본 만화와 드라마를 베낀 게 많다. 역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막장 드라마가 쏟아지는 원인은 뭐라고 보나.
▽이=촬영 당일 나오는 쪽대본이 난무한다. 그러다 보니 방송사고는 물론이고 어처구니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드라마를 보다 보면 황당한 일이 많다. 일제강점기가 배경인데 지포라이터가 등장하질 않나, 물이 없는데도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장면도 봤다. 원고가 엉망이라도 시간이 없으니 그냥 찍고, 시간이 급박하니 잘못된 내용을 검토할 시간도 없는 거다. 촬영 현장에 연출이 없어졌다. 반면 일본 NHK는 모든 드라마가 편성 전 사전제작을 한다. 작가 원고도 최소 3번 이상 수정을 거친다.
▽최불암=근본적으로는 시청률 지상주의가 문제다. 과거엔 각 방송사마다 중요시하는 가치가 달랐는데 이제는 공영방송조차 돈이 되는 드라마 시청률에 매달린다.
―작가나 방송사로서는 시청률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감동을 능가하는 인기 요소는 없다. 작품이 좋으면 시청률도 따라온다. 문제는 우리끼리의 시청률이 아니다. 이제 드라마가 문화 수출품이 됐다. 세계가 우리의 작품을 볼 텐데 체면이 말이 아닌 거다.
―출연료 미지급 문제, 쪽대본은 꽤 오랫동안 지적돼 온 폐단이다.
▽이=출연료 미지급 문제는 부실한 외주제작사 관행 때문인데, 이때 고액 출연자는 다 돈을 받는다. 그리고 결국 돈을 못 받는 건 단역과 방송 스태프다. 이건 범죄다. 방송국에서는 외주제작사 탓을 하지만 근본적으로 (방송사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유=정부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8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 표준계약서를 만들 때 방송사를 설득하기 쉽지 않았다. 표준계약서가 잘 지켜지려면 종사자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불공정행위가 이뤄지면 신고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소극적인 게 아쉽다.
▽이=고액 출연료는 돌연변이다. 별안간 뛰었다. 일부 스타가 회당 억대 출연료를 받는데, 사실 제작조건을 알면 감히 그 돈을 달라고 할 수 없다. 이건 배우만 나무랄 게 아니다. 제작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좀 인기가 있으면 광고나 영화를 하려 하지 힘든 드라마에 출연하려 하지 않는다. 이러니 출연료가 부르는 게 값이 된 상황이다. 결국 방송국이 나서야 한다. 작품을 전략적으로 기획하고 스타 대신 과감히 신인을 키워야 한다.
―요새 젊은 배우를 보면서 아쉬움도 있지 않나.
▽최=과거에는 방송사 전속 배우를 뽑다 보니 연기의 기본이나 방송의 정신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이제는 인기 많고 돈 좀 벌면 된다는 생각뿐 직업적 사명감이 없는 것 같아 아쉽다.
▽이=좋은 조건을 갖고 있어 잘 키우면 크게 성장할 수 있는데 제대로 교육을 받지 않아 흐지부지 끝나는 젊은 배우가 많다. 대본 나오면 촬영하기에 급급하니까 연기가 만날 똑같다. 깡패 건달 역은 잘하는데 지적 연기는 못한다. 젊은 친구들에게 “영화나 드라마 끝나면 뭐하느냐. 시간 있을 때 액터스튜디오 가서 공부하고 오라”고 한다. 더욱이 요즘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정착되다 보니 스타를 확보한 특정 기획사가 조연 캐스팅까지 좌우한다. 방송사에서 이런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한국 드라마 발전을 위해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최=1930년대 미국 대공황 시기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국가의 새판을 짤 때 핵심은 문화정책이었다. 문화계 종사자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작품에 프런티어정신, 로맨티시즘, 정의, 휴머니즘의 메시지를 심어 미국의 정체성을 세우는 작업을 했다. ‘슈퍼맨’도 그때 나온 콘텐츠다. 우리 드라마도 출생의 비밀과 불륜 같은 소재만 다룰 게 아니라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고, 우리의 정체성을 담은 소재를 찾아야 한다.
▽유=한류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그러나 한국 드라마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개선돼야 할 부분이 많다. 배우나 작가, 스태프 등 방송 제작자가 창의력을 발휘할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정부와 업계가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한다.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