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신군부 도와주나” 묻자 “내 명예보다 나라경제 더 중요”
김재익 수석비서관(왼쪽)이 1981년 전두환 대통령에게 경제현안을 설명하며 결재를 받고 있는 모습.동아일보DB
1975년 봄 나는 고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을 처음 만났다. 그분은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관으로 부임하셨고 나는 경제기획국 투자2과 사무관이었다. 훤칠한 키에 해맑은 얼굴, 유난히 번쩍이는 안경 렌즈에 눈동자가 맑아 보통 분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에 밴 겸손, 사심 없고 청렴하며 강직한 성품, 상대방에 대한 배려, 그리고 탁월한 설득력, 경제를 내다보는 혜안과 식견에 점점 매료되어 갔다. 나는 약 5년간 그분의 부하 직원으로 지낼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 뛰어난 이론가이자 실천가
1979년 12·12쿠데타가 있었고 제2차 석유파동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였다. 그해 말 다음 해의 경제전망에 관해 부총리 주재의 회의가 열렸다. 재무장관, 상공장관, 기획원 간부들이 모두 참석했다. 주요 의제는 새해(1980년) 경제성장 전망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국 국장들은 5% 정도 성장할 것이라고 했지만 김 국장은 “0%”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놀람과 당혹감으로 싸늘해진 회의 분위기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실제로 1980년 성장률은 마이너스 1.5%였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등은 매년 정기적으로 경제조사단을 파견했는데 고인은 그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관료였다. 그를 만나고 나오는 외국인들은 그의 명쾌한 설명에 매료되곤 했다. 외국의 장관 등 고위 관료들도 청와대를 방문하기 전에 그를 만나 사전 브리핑을 받고는 했다.
김 국장의 또 다른 탁월한 업적으로 통신개혁을 들 수 있다. 그는 “통신, 전화시스템을 개선하지 않으면 절대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전화시스템은 기계식 교환장치였다. 전화선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때라 전화번호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신청 후 몇 년을 기다려도 전화번호가 나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김 국장은 온갖 비방과 반대를 무릅쓰고 통신개혁을 밀고 나갔다.
○ 정이 많고 세심했던 분
1978년 봄 미국에 출장 가는 그를 수행하게 되었다. 뉴욕에 도착한 날이 금요일 오후였다. 이틀 동안 친구와 뉴욕 시내를 돌아다니다 호텔방에 들어오면 어김없이 안부 편지가 놓여있었다. 그렇게 정이 많고 세심한 분이었다. 김 국장은 출장 기간 내내 얻은 경제 분야 보고서를 대학원생들이 과제물 읽듯이 전부 읽는 것 같았다. 출장 일정을 마치는 마지막 날 “우리 한번 즐겨보세!”라고 하셔서 무슨 말인가 했더니, 로비에 나가 칵테일을 한 잔씩 하든지 아니면 방에 있는 TV 수상기에 동전을 넣으면 영화를 볼 수도 있는데 나보고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맑고 소박한 분이었다. 짐 가방을 옮기는 것도 부하 직원이 상관의 가방을 들고 가는 게 도리인데 어떤 때는 내 짐을 끌고 가시는 경우도 있었다.
상대방과 통화할 때는 먼저 끊는 법이 없었는데 부하 직원인 나도 끊지를 못해 서로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 엄청난 독서광
맹정주 전 서울 강남구청장
나는 그에게 “왜 국보위에 협력하시나요?”라고 여쭤본 적이 있다. 그는 “나라경제가 잘되어야 하지 않아? 내 일신의 명예보다 나라경제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돕는 거네” 하셨다.
실제로 그분은 국민소득이 올라가면, 필연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며 이렇게 되면 소련도 시베리아 개발에 한국을 초청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분이 추진하려고 했던 많은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속속 이루어졌다. 국장 시절에는 힘이 없어 못 이룬 일들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간 후, 또는 돌아가신 이후에 실현되었다. 고인은 훌륭한 경제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전략가였고 대담한 실천자였다.
국가의 발전을 위한 미래를 꿈꾸고 비전을 만들어내고 최고통치자와 국민을 설득하여 이를 현실화했다. 공직자로 사는 일에 대해 모범을 보여주신 고인의 삶을 돌아볼 때마다 숙연해진다.
맹정주 전 서울 강남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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