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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경의 ‘100세 시대’]내가 만난 영국의 노인들

입력 | 2013-10-01 03:00:00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지난 석 달간 영국에 머물면서 영국 노인의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건 노인복지 전공자인 내겐 아주 좋은 기회였다. 우리나라도 2025년이 되면 지금의 영국처럼 노인인구가 20%인 ‘초고령사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서 오늘날의 영국 사회를 관찰하는 것은 10여 년 뒤 우리 사회의 모습을 가늠해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복지선진국이 그러하듯 영국에서도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노인들의 여유롭고 행복한 표정이다. 건강한 노인만 그런 게 아니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주간보호센터에서 열심히 색종이를 접고 있는 노인들도 밝고 화려해 보인다. 밝은 옷을 입고 멋을 낸 모습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영국 노인은 ‘나이 든다는 게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구나’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노인들의 활기찬 일상도 특징적이다. 런던 근교에서 만난 레베카 씨(71)도 그랬다. 레베카 씨는 일주일에 두 번은 U3A(University of the Third Age·정부 지원 없이 노인들 스스로 꾸려나가는 일종의 노인대학)에 가는데, 한 번은 학생으로 스페인어를 배우고, 한 번은 선생으로 뜨개질을 가르친다. 일주일에 한 번은 자선가게(charity shop)에서 물건 파는 자원봉사를 하고, 한 번은 동네 도서관에서 어린이들에게 동화책 읽어주는 일을 한다. 가끔 이민자 가족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주말에는 친한 친구를 만나거나 가족과 함께 정원을 가꾼다. 레베카 씨의 일상은 배우고 일하고 봉사하고 즐기는 활동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인으로 산다는 게 고통스럽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에 레베카 씨는 “나는 노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젊다. 진짜 노인이 되려면 최소한 80세는 넘어야 한다”면서 웃었다. “그냥 선배시민(senior citizen)이라고 불러 달라”는 말도 했다. 그녀는 덧붙였다. “나이 드는 게 좋은 점도 많아요. 젊었을 때야 일하랴, 가족들 보살피랴 팍팍하게 살았지만 이젠 책임은 없고 즐길 건 많으니까요.”

레베카 씨가 말한 ‘선배시민’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한국 교민들이 ‘옆집 할머니’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옆집에 사는 영국 노인들이 커튼 뒤에서 교민들의 집 동향을 살피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11세 이하 어린이를 집에 혼자 놔둔 채 외출하는 한국 부모를 감시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사람이 바로 옆집 할머니라는 것이다.

우리네 정서로는 남의 집 일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은 ‘까칠하고 무서운 할머니’로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동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데 힘을 보태야 한다고 믿는 옆집 할머니들의 사명감이야말로 한 사회를 건전하게 유지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의 노인들은 독립적이다. 남한테 신세 지는 걸 싫어한다. 버스에서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80대 남자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가 끝내 사양하는 바람에 머쓱해진 적도 있다. 이들은 웬만하면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아니 도움을 받기는커녕 도움을 주려고 한다. 한 번은 한적한 동네의 버스정류장에서 당장이라도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 여자 노인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90세는 되어 보이고 지팡이에 의지한 채 힘들게 걸어오던 노인이 내 앞에서 멈췄다. ‘나한테 뭔가 도움을 청하려나 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움이 필요한가요?”

그뿐인가. 나는 영국의 노인들이야말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창조적 영국(Creative Britain)’이라는 나무를 떠받치고 있는 ‘뿌리’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소중하지만 점점 사라져 가는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지키고 계승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젊은이보다 열심히 신문을 읽고,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며, 자원봉사를 더 많이 하고, 동네 축제에 오래된 물건을 가지고 나와 팔면서 손때 묻은 낡은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소위 ‘돈 안 되는’ 문화예술의 현장을 지키는 사람들도 노인들이다.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촬영지나 뮤지컬 극장처럼 ‘돈 되는’ 문화산업의 현장에는 젊은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고전음악이나 발레 공연장처럼 별로 돈이 되지 않는 현장을 지키는 건 바로 노인들이었다. 런던 시내의 앨버트홀 앞을 지나다가 평균 80세는 족히 되어 보이는 노인들이 별로 유명해 보이지도 않는 발레공연을 보려고 길게 줄을 선 모습에 ‘내가 지금 실버타운에 와 있나’라는 착각마저 들었을 정도다.

영국의 노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노인문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노인은 도움이나 보호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있었다.

영국의 노인들을 보면서 ‘노인 한 명이 죽는 건 도서관 한 개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노인으로부터 젊은이로 이어져 내려오는 가치와 자원, 지혜는 오늘날의 영국 사회를 이루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노인이 없는 영국’을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