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호 군사전문기자
화학무기의 끔찍한 역사는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시작됐다. 독일군은 1915년 벨기에의 이프르 전선에서 프랑스군에 염소가스 공격을 감행했다. 독일군 진영에서 바람을 타고 온 노란 안개를 연막탄으로 착각한 프랑스군은 참호 속으로 숨었다가 5000여 명이 숨지고 60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세계 각국은 1925년 질식성·독성 가스 사용을 금지하는 제네바 의정서를 체결했지만 손쉽게 적을 몰살시킬 수 있는 ‘사신(死神)의 유혹’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중국에서 ‘이페리트’라는 치명적인 독가스를 살포해 1000여 명을 살해했다. 독일 나치는 살충제로 만든 ‘치클론-B’라는 독가스로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했다.
국제사회는 1997년 화학무기금지협약(CWC)을 발효시켜 화학무기의 개발과 생산, 비축, 사용을 금지하고, 보유하고 있는 화학무기도 폐기토록 했다. 그러나 시리아 정부군은 이를 비웃듯 두 달 전 사린가스로 자국민 1300여 명을 살육했다. 사린가스는 2차 대전 때 독일이 개발한 독가스로 1995년 일본 옴진리교 신자들이 도쿄 지하철역에 뿌려 12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 사용됐다.
최근 미국과 러시아가 시리아의 화학무기 폐기에 원칙적으로 합의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시리아 정부가 뒤늦게 CWC에 가입하고 화학무기 포기 의사를 밝힌 것도 국제사회의 개입을 모면하려는 꼼수로 보인다. 자칫 잘못하면 시리아 정부에 대한 징벌은커녕 ‘면죄부’를 주게 되지 않을지 우려스럽다.
시리아 화학무기 참사는 결코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최대 5000t에 이르는 화학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은 시리아보다 훨씬 위험하다. 북한은 유사시 사린가스나 신경작용제 VX 같은 화학탄두를 탑재한 야포와 미사일로 한국의 주요 군사시설과 인구밀집지역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사린가스의 경우 650t으로 서울시민 30∼40%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을 것으로 정보당국은 보고 있다. 북한의 화학무기 보유 규모는 남한 인구를 절멸(絶滅)시킬 수 있는 수준이라는 분석도 있다. 최근 방한했던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도 북한의 화학무기가 주한미군과 한반도 안보에 큰 위협이라고 지적했다.
설마 북한이 동족을 화학무기로 공격할까 하는 의구심은 북한의 핵무기가 실전용이 아니라 체제유지용 협상수단이라는 착각만큼이나 안일하다. 북한은 190개국이 가입한 CWC를 끝까지 외면하는 4개국 중 하나다. 화학무기로 적군과 동족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한 주범들은 대개 권력의 광기와 폭력에 굶주린 독재정권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이쯤 되면 최악의 절대 독재국가인 북한의 화학무기 공격은 가능성이 아닌 기정사실로 봐야 하지 않을까.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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