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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뱃살 두둑해야 특급 검투사… 여성끼리 싸움도

입력 | 2013-10-05 03:00:00

◇로마 검투사의 일생/배은숙 지음/588쪽·2만5000원/글항아리
피의 축제를 통해 본 로마문화사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의 그림 ‘폴리케 베르소’(‘뒤집힌 엄지’라는 뜻의 라틴어). 승리한 검투사가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자 흥분한 관중이 엄지를 아래로 가리키며 패한 검투사를 죽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글항아리 제공

‘몸집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여성 검투사의 싸움은 남성보다는 검의 타격이 약해 재미를 주지 못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생존을 건 싸움이므로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투구를 쓰지 않는 여성 검투사들의 특성상 긴 머리카락은 상대를 공격하거나 자신이 맞았을 때 움직임을 극대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책 속에 담긴 여성 검투사의 싸움에 대한 묘사다. 로마인들은 한쪽에선 ‘여성들의 싸움이 남성의 용맹함에 대한 모욕’이라며 점잖게 비판하면서도 경기장에 올라온 검투사의 각선미는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흥분했다. 장애인도 볼거리 집착의 희생양이 됐다. 여성 검투사와 난쟁이가 싸우는 모습은 그들에겐 박장대소하며 보는 색다른 오락이었다. 책에는 로마 검투사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도 하루라도 더 살길 간절히 원했던 그들의 애잔함이 전해져 온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로마 검투사는 군살은 찾아볼 수 없는 우람한 근육과 식스팩(복근)을 자랑한다. 하지만 오늘날과 비교하면 그들의 키는 그리 크지 않았다. 우수한 검투사로 꼽힌 갈리아, 브리타니아, 게르만 출신의 평균 키는 170cm였다. 평균 165cm인 로마인에게는 커보였겠지만 현대인 기준에선 오히려 작은 편이다. 배를 덮은 지방층은 오히려 무기였다. 지방이 두툼하면 맞아도 덜 아프고 장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것도 방지했다. 지방을 많이 축적하는 것이 검투사의 능력 중 하나로 꼽혔다.

대부분 전쟁포로나 노예, 범죄자가 검을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여성뿐 아니라 자유민도 자발적으로 검투사가 됐다. 그들 중에는 검투사의 삶을 동경한 낭만파도 있었지만 빚과 가난에 쫓기는 생계형이 대부분이었다. 막다른 삶에 몰린 끝에 로마시민 자격이 박탈되는 검투사가 돼 승리수당이라도 챙기겠다는 절박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부자들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살해자를 사지만 가난한 자들은 살해당할 곳에 자신을 팔았다”란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 자유민 출신 검투사는 싸움 기술에 능한 전쟁포로보다 더 인기를 끌었다. 전쟁포로는 마지못해 싸웠지만 자유민 출신은 마지막 희망을 찾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웠기 때문이다.

로마 검투사는 ‘불에 타고, 사슬에 속박되고, 막대기로 매질을 당하고, 검으로 살해되어도 참겠다’는 살벌한 맹세를 했다. 그들은 ‘싸움을 좋아하는 남자’ ‘전사 같은 남자’ 같은 별칭을 지어 남성성을 과시했다. 그러나 검투사도 죽음이 두려운 인간이었다. 경기 하루 전날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최후의 만찬이 차려졌지만 어두운 표정으로 잘 삼키지도 못했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싸울 수는 없을 정도의 상처를 입어 싸움을 피하려 했다.

혹독한 훈련과 매질, 죽음의 공포에 지친 검투사는 자살을 택했다. 도망은 삼엄한 감시와 발에 채워진 사슬 때문에 불가능했다. 수레바퀴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서로 목을 졸라 죽이고 남은 사람이 벽에 제 머리를 찧어 죽기도 했다. 대변 닦을 때 쓰는 스펀지 달린 막대기를 제 입속에 밀어 넣기도 했다.

로마 역사를 천착해온 저자(계명대 외래교수)는 ‘강대국의 비밀-로마 제국은 병사들이 만들었다’(2008년)로 로마 군대의 일상을 생생히 복원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출판기획안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이번 책도 풍부한 1·2차 사료를 바탕으로 로마 검투사의 삶을 재현했다. 책은 두껍지만 실제 현장에서 중계하듯이 서술해 술술 잘 읽힌다. 검투사의 일생뿐 아니라 스파르타쿠스 반란, 검투사의 기원, 정치적 의미까지 외연을 확장해 읽을거리도 풍부하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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