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검투사의 일생/배은숙 지음/588쪽·2만5000원/글항아리피의 축제를 통해 본 로마문화사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의 그림 ‘폴리케 베르소’(‘뒤집힌 엄지’라는 뜻의 라틴어). 승리한 검투사가 관중석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자 흥분한 관중이 엄지를 아래로 가리키며 패한 검투사를 죽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글항아리 제공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로마 검투사는 군살은 찾아볼 수 없는 우람한 근육과 식스팩(복근)을 자랑한다. 하지만 오늘날과 비교하면 그들의 키는 그리 크지 않았다. 우수한 검투사로 꼽힌 갈리아, 브리타니아, 게르만 출신의 평균 키는 170cm였다. 평균 165cm인 로마인에게는 커보였겠지만 현대인 기준에선 오히려 작은 편이다. 배를 덮은 지방층은 오히려 무기였다. 지방이 두툼하면 맞아도 덜 아프고 장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것도 방지했다. 지방을 많이 축적하는 것이 검투사의 능력 중 하나로 꼽혔다.
로마 검투사는 ‘불에 타고, 사슬에 속박되고, 막대기로 매질을 당하고, 검으로 살해되어도 참겠다’는 살벌한 맹세를 했다. 그들은 ‘싸움을 좋아하는 남자’ ‘전사 같은 남자’ 같은 별칭을 지어 남성성을 과시했다. 그러나 검투사도 죽음이 두려운 인간이었다. 경기 하루 전날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최후의 만찬이 차려졌지만 어두운 표정으로 잘 삼키지도 못했다.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싸울 수는 없을 정도의 상처를 입어 싸움을 피하려 했다.
혹독한 훈련과 매질, 죽음의 공포에 지친 검투사는 자살을 택했다. 도망은 삼엄한 감시와 발에 채워진 사슬 때문에 불가능했다. 수레바퀴에 머리를 집어넣거나 서로 목을 졸라 죽이고 남은 사람이 벽에 제 머리를 찧어 죽기도 했다. 대변 닦을 때 쓰는 스펀지 달린 막대기를 제 입속에 밀어 넣기도 했다.
로마 역사를 천착해온 저자(계명대 외래교수)는 ‘강대국의 비밀-로마 제국은 병사들이 만들었다’(2008년)로 로마 군대의 일상을 생생히 복원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우수출판기획안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이번 책도 풍부한 1·2차 사료를 바탕으로 로마 검투사의 삶을 재현했다. 책은 두껍지만 실제 현장에서 중계하듯이 서술해 술술 잘 읽힌다. 검투사의 일생뿐 아니라 스파르타쿠스 반란, 검투사의 기원, 정치적 의미까지 외연을 확장해 읽을거리도 풍부하다.
박훈상 기자 tigermas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