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분마다 산삼 한뿌리… 美심마니 동행 취재기
‘미국인 심마니’ 토머스 셰퍼드 씨가 지난달 14일 직접 캔 산삼 한 뿌리를 들고 웃음을 짓고 있다. 그는 이날 기자와 동행한 5시간 동안 무려 30여 뿌리의 산삼을 캤다. 배경은 인근 유명 관광지인 그레이트스모키마운틴 전경. 노스캐롤라이나·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그런데 그는 “여기 하나 있네요”라며 심드렁하게 산삼을 가리켰다. 기자와 함께 해발 700m 산등성이를 넘어 긴 막대기로 덤불을 처음 헤치던 참이었다. 한국에서는 심마니들이 몇 달을 찾아 헤매도 좀처럼 얼굴을 내밀지 않는 산삼. 동행자의 마음은 설렘과 흥분으로 차올랐지만 토머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심봤다∼’라는 긴 외침도 없었고, 한국 심마니들처럼 소주 한잔 올려놓고 산삼을 허락한 산신령에게 절을 하는 것 또한 볼 수 없었다.
두 시간이 지난 오전 11시 50분경. 동쪽 능선 아래를 뒤지던 토머스가 “정말 큰 것이 있다”고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한 줄기에 네 가지가 달려 있고 파란 이파리와 빨간 열매 송이가 달린 실한 놈이었다. 뇌두(산삼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와 몸통에 나타난 나이는 50년가량. 나보다 먼저 태어나 지구 반대편 산기슭에서 뿌리를 키워온 산삼을 만나는 기분은 정말 묘했다.
미국의 산에는 산삼이 한마디로 지천에 널려 있었다. 이번 심마니 여행을 주선한 재미교포 미국 산삼 전문가 최창수 HQ헬스·산삼 대표(58)는 “한국의 산삼 자생지를 모두 합쳐도 미국에 비하면 1만분의 1도 안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날 약 다섯 시간 동안 토머스의 활동 무대인 메니 마운틴을 뒤진 결과 일행은 크고 작은 산삼 30여 뿌리를 캘 수 있었다.
산삼이 자랄 만한 산속에 씨앗을 뿌려 키운 것들이 아니라 산삼의 열매를 먹은 새들이 이곳저곳에 변을 뿌려 자라난 천연 산삼들이어서 더욱 놀라웠다. 한국에서는 천종산삼 또는 지종산삼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미국인들은 그저 야생산삼(Wild Ginseng)이라고 불렀다. 한국인들이 평생 한 뿌리라도 먹어봤으면 하고 소원하는 진짜 천연 산삼들이 미국의 야산에서 양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자라나고 있다.
▼ 10~50년 묵은 산삼 줄줄이… 美심마니는 심드렁했다 ▼
지난달 14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메니 마운틴으로 ‘산삼 찾기’ 동행 취재에 나선 신석호 특파원이 산에서 막 캐낸 산삼을 들어 보였다.
한국보다는 덜하지만 산삼은 미국에서도 귀하고 비싼 약용 식물로 인정받고 있다. 마구잡이 채취로 인한 멸종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은 일찍부터 생산과 유통의 전 과정을 규제해왔다.
요즘은 산삼을 캐는 시즌이다. 뉴욕과 노스캐롤라이나 주는 9월 1일부터 3개월 동안만 산삼을 캘 수 있다. 유통업자에게 팔 때는 자신의 인적사항을 기록해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 메릴랜드 주 등지에서는 면허를 받은 사람만 산삼을 캘 수 있도록 했다.
대부분의 주에서 하루 1파운드 이하로 5년 이상 자란 나이든 산삼(대략 가지가 세 개 이상)만 캘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미국에서 낚시를 하면 사전에 면허를 받고 일정량만 가져가고 어린 고기는 놓아주어야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심마니에게서 산삼을 구입해 유통시키는 판매업자에 대한 규제는 더 강력하다. 정부 허가를 받지 않고 산삼을 유통시키다 걸리면 벌금을 물거나 징역형에 처해진다. 수출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행색이 초라해 보이는 40대 크리스 웹 씨는 친구와 함께 캔 산삼을 들고 왔다. 전자저울에 올려진 산삼은 합해서 1파운드(약 453g), 토머스 형제가 사들이는 산지 수매가격은 215달러(약 23만 원)였다.
웹 씨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7시간 일했다”며 “돈은 잘 모아두었다가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는 데 쓰겠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채취 시즌을 맞아 이날 하루 동안 10여 명의 심마니가 5파운드의 산삼을 들고 와 딜러에게 팔고 돌아갔다.
이 지역에만 심마니 1000여 명이 가을이면 산속을 헤맨다. 허가받은 유통업자는 토머스 형제를 포함해 모두 30여 명. 유통업자들은 이렇게 거둔 산삼을 모아서 주 정부의 검사원에게 들고 가 인증을 받은 뒤에야 도소매업자나 해외 수출업자에게 넘길 수 있다. 산삼을 캐 직접 먹으려는 1차 소비자도 인증과정을 면할 수 없다. 기자도 이날 토머스의 도움을 받아 캔 산삼을 직접 들고 유통과정에 끼어들었다.
전자저울 위에 올라간 산삼 30뿌리의 무게는 0.35파운드. 75.25달러였다. 기념 선물로 그냥 주겠다는 토머스를 설득해 100달러를 지불했다. 유통마진이 생략된 터무니없이 싼 값이었지만 미국 산삼의 세계로 인도해 준 대가 25달러를 얹은 셈이다.
토머스는 “오늘은 토요일이라서 검사원이 일하지 않는다”며 “월요일에 주 정부 검사원에게 가져가 인증서를 받은 뒤 집으로 배송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쉽지만 태어나서 처음 만져본 산삼과 잠시 이별해야 했다.
꼭 4일 뒤인 지난달 19일 오후 집배원이 버지니아 주 비엔나의 집으로 배달해 준 메일 박스에는 비닐 보관함 속 젖은 휴지 위에 가지런히 누운 산삼 30여 뿌리와 함께 노스캐롤라이나 주 정부 검사원이 사인한 A4용지 한 장짜리 인증서가 들어 있었다. 노스캐롤라이나산(産) 말리지 않은(green) 야생 산삼이라는 확인과 캔 날짜와 무게 등이 적혀 있었다. 합법적인 미국 산삼 소비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미국의 보통 사람들 사이에는 산삼의 효능을 둘러싼 신화 같은 것은 없는 듯했다. 산삼을 캐서 파는 토머스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기자가 “한국에서는 산삼을 먹으면 죽어가던 사람도 벌떡 일어선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클린트는 “그래요? 그럼 오늘부터라도 매일 한 뿌리씩 먹어야겠네요”라며 웃었다. “어떤 산삼은 한국에서 억대에 거래된다”고 하자 토머스는 “와! 우리 집과 땅을 합쳐도 될까 말까 한 돈”이라고 대답했다.
미국 산삼의 효능은 어느 정도일까. 뉴욕 주 정부 사이트는 1977년 한 미국 박사의 평가를 인용해 “어떤 약용 식물보다 뛰어난 효능을 지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이들을 위한 만병통치약”이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약용 식물에 대한 서방의 무지 때문에 오랫동안 효능이 무시돼 왔다고 동시에 지적했다. 21세기를 넘어서면서 산삼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정부와 대학, 각종 연구소 등을 통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14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메니 마운틴 일 원에서 일행이 한나절 동안 캔 30여 뿌리의 미국 산 삼을 등산조끼 위에 모은 장면(왼쪽). 4일 뒤 기자의 버지니아 주 집으로 배달된 산삼 상자에 ‘노스캐롤라 이나산 미국 야생 산삼이 맞다’는 주정부의 인증서가 들어 있었다(오른쪽). 노스캐롤라이나·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한국 산삼과 미국 산삼의 성분과 효능 차이를 직접 비교한 연구 결과는 거의 없다. 한 뿌리에 수백만∼수억 원 하는 한국 산삼을 실험 재료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2001년 캐나다의 오타와대에 제출된 한 박사 후 논문에 따르면 미국 산삼과 장뇌삼, 인삼 그리고 한국 장뇌삼과 인삼의 성분을 비교한 결과 같은 비교 군에서 미국 삼의 사포닌 함량이 더 풍부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포닌의 종류는 한국 삼이 더 다양하지만 사포닌 함량은 미국 삼이 더 많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나오는 산삼 대부분은 미국내에서 소비되지 않고 미국내 무역상을 통해 홍콩의 국제시장으로 나가 해외로 수출된다. 그중 대부분은 산삼 소비 대국인 중국으로 빨려 들어간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2010년 전 세계로 수출된 미국 산삼은 2만2726kg. 이 가운데 90%인 2만650kg이 홍콩 국제시장으로 수출됐다. 미주의 또 다른 산삼 강국인 캐나다로 862kg, 싱가포르로 537kg이 팔려 나갔다.
산삼의 효능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주요 2개국(G2)으로 도약한 중국의 경제 성장으로 산삼 소비가 늘고 값이 뛰자 마구잡이 채취로 인한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좋은 물건은 한 뿌리의 산지가격이 1000달러를 호가하면서 미국 전역에서 16만여 명의 심마니들이 산을 헤집고 다니는 상황이 되자 미시간 주의 경우 산삼 채취를 전면 금지했다. 주 정부 소유의 산은 물론이고 개인 소유의 산에서도 채취를 금지했다.
올해 6월 23일자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메릴랜드 주의 산삼 채취량은 1996년 423파운드에서 2000년 227파운드로, 2010년에는 143파운드로 급감했다. 주 정부에 산삼 채집 금지를 건의한 조너선 맥나이트 씨는 WP 인터뷰에서 “몽고메리와 볼티모어 지역에서는 산삼이 자취를 감췄고 서부에서도 수확량이 크게 줄어들었다”며 “중국 특수로 산삼 가격이 불법 약물처럼 뛰어올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에 나오는 야생 산삼이 줄어들자 사람이 야산에 씨를 뿌려 기른 미국산 산양삼(Wild-simulated)과 밭에서 기른 인삼(Cultivated)의 생산과 수출도 늘어나고 있다. 2010년 미국의 인삼 수출량은 19만9221kg으로 야생 산삼의 8배를 넘는다. 20일 버지니아 주 비엔나 시의 중국 마켓에서는 말린 미국 인삼이 4온스(113.4g)에 34.99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산삼과 인삼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들도 이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일부 재미교포나 한국인들은 미국에서 숲을 구입해 산양삼과 인삼 재배를 시작했다. 미국판 산삼 랜드를 만드는 게 이들의 꿈이다.
노스캐롤라이나·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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