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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 없는 전투 도발하고 질 수 없는 도발에 당했다, 왜?

입력 | 2013-10-04 16:59:00

서해에 수장된 남북교전의 진실

● 제2 연평해전은 합참의 육군식 전술이 빚은 참화
● 천안함 사건 나기 전 수중도발 경고 있었건만…
● 연평도 사건 당시 F-15K로 응징 못한 속사정




1999년 6월 15일 벌어진 제1연평해전. 우리 고속정이 북한 경비정을 들이받은 직후 교전이 시작됐다.

1999년 제1 연평해전부터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까지 남과 북은 서해에서 5차례 충돌했다. 지난 14년간 벌어진 서해교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불편한 진실과 만나게 되고 의문이 꼬리를 문다.

제1 연평해전의 경우 우리는 이제껏 북한 어선과 경비정들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는 도발을 해왔기 때문에 해군이 이를 차단하다가 벌어진 교전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해 6월 6일 시작한 무력시위 기간에 남과 북의 해군은 똑같이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서로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포를 하늘로 쳐들었다. 교전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6월 15일 북한군 사상자가 100여 명에 달한 대규모 교전이 벌어진 이유가 뭘까. 9일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2002년 제2 연평해전의 경우는 더 황당하다. 3년 전의 충격적인 패배로 피에 굶주린 북한의 기습공격이 예상돼 우리 2함대사령관이 “적 함정과 3km 거리를 유지하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정상적인 지휘계통이 무력화하고 작전에 간섭하는 세력이 2함대 지휘계통에 개입했다. 마치 무엇엔가 홀린 것처럼 우리 고속정 2척이 최저 속도로 북한 경비정에 150m라는 ‘섬뜩한 거리’로 접근했다가 공격을 받았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보직해임을 당한 2함대사령관이 얼마 후 화병으로 숨진다. 그가 사망하기 직전 해군 선배에게 털어놓은 교전의 진실은 뭘까.

2009년 대청해전은 우리의 단호한 대응으로 북 함정을 격파하고 6명을 사상케 한 교전이다. 이전의 두 번의 교전에 비해 매우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북한 함정을 제압했음에도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려고 북한과 비밀접촉을 하던 이명박 정부는 우리 해군의 과잉대응 여부를 조사했다. 당시 군에 대한 청와대의 불편한 심기를 엿볼 수 있다.

2010년 3월 천안함 폭침사건을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이 또 드러난다. 사건 일주일 전 한 예비역 해군 제독은 북한의 보복공격이 임박했음을 예견하고 군 최고위층에 북의 수중도발을 경고했다. 한미연합사도 대청해전 직후부터 북의 비대칭 도발 가능성을 우리 합동참모본부(합참)에 경고했다. 따라서 긴박한 경고와 대비의 필요성이 강조됐는데도 전혀 대비하지 못한 이유가 뭘까.

그해 10월의 연평도 포격사건 때도 도발 징후가 있었다. 사건 전날 북의 경고 메시지가 날아들었고, 사건 당일 오전에도 합참 정보본부는 “적의 화력도발에 대비 필요”를 강조하는 첩보를 작전본부로 전달했다. 그런데도 연평도의 우리 해병대는 이에 대비하지 못한 채 북으로부터 대규모 지상포 공격을 받았다.

북한에 비해 압도적인 성능의 수상함과 우세한 정보력, 후방 지원전력을 갖춘 우리 군은 서해에서 분쟁을 관리하면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다. 그런데도 서해의 분쟁상황을 과연 우리가 제대로 통제했는지, 군사력 운용이 과연 합리적이었는지, 이 다섯 번의 교전을 보면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아무도 그 원인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가장 충격적인 천안함 폭침사건의 경우 벌써 3년도 더 지났지만 그동안 이에 대한 세미나, 학술대회도 없고 제대로 된 논문 하나 발표된 적이 없다. 그러니 앞에서 필자가 제기한 의문에 대해 우리 정부는 “비정상적이고 호전적인 북한이 계획적으로 도발한 사건” 외에 아무런 추가 설명을 하지 않는다.

합참과 해군의 반목

우리는 서해 안보 문제의 핵심 원인에 대해 제대로 질문한 적이 없다. 당연히 합리적인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질문이 없으니 더 연구할 필요도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미국은 큰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로부터 교훈을 얻기 위해 몇 년이고 검증, 또 검증한다. 1960년대 피그스 만 사건과 쿠바 미사일 위기, 1970년대 베트남전 패배, 1980년대 이란 인질구출작전 등 비록 실패한 작전이라고 해도 재검증하고 재분석한다.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 교훈을 얻을 수 없는 군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앞으로 서해에서 우리 군인들이 또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의 무능과 게으름이 어쩌면 미래에 또 다른 희생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5차례 교전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점은 서해에서 안보위기가 고조될 때조차 유니폼이 다른 육·해·공군 조직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한다는 것이다. 각 조직은 ‘우리가 가장 스마트하다’고 여기며 다른 조직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로 인해 자기 조직이 상황을 통제하려고 다른 조직을 억누르며, 더 많은 권력과 명성에 집착하는 행태를 보인다. 이러니 위기가 끝나도 조직 간에는 감정적 갈등과 앙금이 남는다.

서해 사건들을 보면 바다에 대한 전문성이 없는 육군 위주의 합참과 해군 2함대사령부 간에 권한과 책임에 대한 분쟁이 벌어지고 극도로 불신하며 대립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 결과 국가 차원에서 군사적 대응의 합리성이 붕괴되고 위기는 더 심화된다. 필자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작전의 최고단위인 합참, 즉 최고사령부의 무능이다. 주로 육군 출신들이다보니 해양에서의 국지전에 대해 전문성을 발휘할 수 없는 조직이 합참이다. 이 때문에 위기를 진정하고 관리해야 할 순간에 거꾸로 위기를 더 고조시키는 잘못된 지시를 내리고 예하부대는 이에 반발한다. 한편 전투 현장에서는 남과 북의 군대라는 조직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국면이 전개되며 관리하기 어려운 상황이 초래된다.

3월 27일 백령도에서 열린 천안함 46용사 3주기 추모식.

필자가 최근 펴낸 ‘시크릿파일-서해전쟁’은 청와대라는 정치권력과 합참-2함대사령부로 연결되는 작전 지휘계통이 서해 위기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상호작용했는지를 추적한 기록물이다. 전·현직 장성과 영관급 장교들을 인터뷰하고, 청와대, 국가정보원, 국회 주요 인사들의 증언을 토대로 5차례 교전에 얽힌 비사(秘史)를 재구성했다. 이 책에서 강조하려 한 것은 합리성이 붕괴되는 순간 남북한 간에 분쟁이 발화된다는 점이다.

북한의 경우 경비정으로 NLL을 도발한 제1, 2 연평해전과 대청해전, 즉 3차례 교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자동화한 사격통제와 속사포로 무장한 현대식 우리 함정에, 구식 함포에다 속도도 느린 북한 경비정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불리한 줄 뻔히 알면서 왜 그처럼 무모한 도발을 세 번이나 반복했는지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이 모든 교전이 북의 계획된 도발로 시작됐다는 건 이미 정설로 굳어졌다. 그런데 무슨 계획된 도발이 할 때마다 패전이란 말인가. 만일 북한이 우리를 효과적으로 공격하려면 자신들이 열세인 수상함 전력이 아니라 압도적으로 우세한 지상화력을 동원하는 게 옳다.

북한의 군사적 합리성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발견된다. 그런데 여기서도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북한이 비밀리에 기습공격한 것이라면 어뢰 추진체에 버젓이 ‘1번’이라는 표기를 함으로써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까닭이 뭘까.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지만, ‘조직의 일상적 업무수행’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대입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미국이 캄차카 반도 부근에서 소련 영해에 비밀리에 들어가 작전을 하면서 해상에 부이(buoy)를 설치한 일이 있다. 그 비밀작전이 소련에 의해 발각된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미군이 설치한 부이에 ‘미국 정부의 재산(The property of U.S government)’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연방법령에 따라 모든 미국 장비에는 의무적으로 이런 글귀를 새겨 넣어야 했다. 조직의 일상적 업무수행은 아무리 중차대한 비상사태라 하더라도 기존의 행동절차나 규정을 준수하느라 더 큰 목적을 간과하는 속성을 보인다.

이런 조직 행태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제1 연평해전 당시 사태가 급격하게 악화된 배경에는 “NLL 선상에 대형 함정이 일렬로 늘어서서 지켜라”는 합참의 어처구니없는 지시가 있었다. 큰 배들이 NLL 선상에 늘어서 버티라는 건 지상군 문화의 산물이다. 못 보던 큰 배가 전투해역에 나타나니까 북한도 어뢰정을 출동시키기 시작했고, 이에 우리 해군은 어뢰정을 무력화하기 위해 선체 충돌을 감행했다.

그런데 이것도 엉뚱한 발상이었다. 선체로 충돌하는 해전은 고대 그리스·로마시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왜 합참은 현대식 함정으로 고대의 전술을 답습했을까. 여기에는 청와대와 합참, 2함대 사이의 이상한 의사소통이 작용했다. 이후 통제하기 어려운 분쟁으로 치달았다. 제2 연평해전도 “북 함정과 3km 거리를 유지하라”는 2함대사령관의 지침과 “근접차단기동을 하라”는 합참의 지시가 충돌하면서 빚어진 비극이다. 서로 다른 지시가 전투 현장에 하달되면서 2함대 지휘체계는 붕괴 조짐을 보였고, 이는 현장에서 전투원의 희생이라는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졌다.

싸움이 끝난 후 책임 소재를 두고 또다시 힘의 논리가 작동했다. 고속정 침몰과 희생자 6명을 낳은 이 비극적 전투와 관련해 합참 지휘라인 관계자들 중 누구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 반면 해군 2함대사령관은 보직해임의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해라”

2010년 11월 23일 북한군에 포격당한 연평도가 화염에 휩싸여 있다. 

천안함 사건 때는 우리 합참이 거의 공황상태가 된다. 사건 발생 후 청와대, 국방부, 합참, 민군합동조사단으로 나뉜 행위자들이 각기 자신에게 유리한 대로 언론에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자 정부는 통제불능 상태가 됐고 극심한 혼선이 빚어졌다. 안보 위기는 원래 선거에서 보수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거꾸로 야당이 그 반사이익을 얻었다. 정부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평도 포격사건 때는 합참과 주한미군 사이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항공기를 동원해 폭격해도 되느냐”고 묻는 합참에 주한미군은 “우리에게 묻지 말고 한국 정부가 알아서 하라”고 답변해 갈등을 겪는다. 항공기로 북한의 포격 도발 원점을 때려도 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우리 장성들의 의견이 양분돼 대혼란이 초래됐다.

천안함 사건 이후 핵추진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가 서해에 진입하는 문제로 한미동맹은 또 한 번 시련을 겪는다. 2010년 6월까지는 “항공모함을 보내달라”는 한국 정부 요청에 미국이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8월에는 미국이 “항공모함을 서해로 보내겠다”고 하는데 우리 정부가 “보내지 말라”고 했다. 두 달 사이에 한미의 방침이 정반대로 바뀐 이유가 뭘까. “보내겠다”는 미국과 “오지 말라”는 한국 정부가 옥신각신하면서 이미 서해로 진입하던 조지워싱턴호가 두 번이나 되돌아가는 사건이 벌어진다. 결국 11월 말로 연기됐는데 그 사이에 연평도 포격 사건이 터졌다. 그 직후 서해에 진입한 조지워싱턴호는 연평도 포격사건 때문에 들어온 것으로 자연스럽게 정리됐다.

이런 소동은 서해에서 미·중 대결이라는 강대국 정치 논리가 작동한 탓에 빚어졌다. 천안함 사건은 미국과 중국이 개입하지 않은 남북한 간 문제였다. 그런데 막상 조지워싱턴호의 서해 진입으로 미국과 중국이 갈등을 겪자 한반도의 두 당사자인 남북한은 조역으로 밀려나고 서해는 국제분쟁의 무대가 된다.

연평도 사건 때의 공군 전투기 출동 문제도 미스터리다. 사건 당시 부근 해역에서는 F-15K 전투기 3대가 비행하고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광판에 표기된 전투기를 가리키며 “저걸로라도 쏘라”고 했다. 문제는 이들 전투기가 공대지미사일을 장착하지 않은 사실을 청와대 지하벙커에 앉아 있던 참모 누구도 몰랐다는 것. 미사일을 달지 않아 때릴 수 없는 전투기였는데, 엉뚱하게도 때릴 수 없는 이유가 유엔사령부의 정전 교전규칙 때문이라고 대통령에게 보고됐다. 이에 합참의장은 자기 권한으로 공대지 임무를 띤 F-15K 전투기 출격을 명령했다. 그런데 전투가 끝나고 2시간이 지나서야 전투기들이 떴다. 합참의 출격 지시가 늦었던 데다, 공군 전투기가 후방기지에서 공대지미사일을 달고 출격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공중작전은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퇴임 직전 이명박 대통령은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군이 반대해서 전투기로 때리지 못했다”고 했다. 대통령이 말하는 군은 도대체 누구인가. 당시 한민구 합참의장은 전투기로 때리라는 지시를 받은 적도 없고, 반대한 적도 없다. 합참의장을 통하지 않는 군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비논리적인 이 대통령의 발언은 퇴임 전날까지 계속된다. 군에 책임을 전가하겠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MB의 책임 전가

연이은 안보위기는 육·해·공군의 치열한 경쟁을 낳았다. 각 군은 조직과 예산을 확장하는 명분으로 안보위기를 활용했다. 육군은 산악여단과 국방어학원을 창설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해군은 잠수함사령부, 해병대는 서북도서방어사령부, 공군은 전투정보단을 창설하는 명분으로 활용했다.

육군은 한 발 더 나아가 숙원인 통합군으로 가기 위한 군 상부구조 개혁의 명분으로 안보위기를 적극 활용하려 했다. 그러자 해군과 공군이 극렬하게 반발했다. 안보위기는 국가 차원의 군사적 합리성을 도모하기 위한 계기가 돼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우리 군 내부의 경쟁과 갈등을 촉진하는 요인이 된다. 정치적으로는 안보위기가 보수 정치권력이 정치적 반대자를 비판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 결과가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의 NLL 논란이라는 북풍(北風)이다.

정치화, 권력화한 안보 담론은 안보 그 자체에도 부정적 영향을 초래하지만, 국민 간의 반목과 대립이라는 자기 파괴적 속성도 드러낸다. 인터넷 댓글로 표출되는 ‘모욕 경쟁’은 서해에서의 남북충돌에 앞서 우리 사회를 내전 양상으로 몰고 간다. 감정싸움은 북한에 대해 더욱 상반된 태도로 분화하면서 서해를 위태롭게 하는 마물(魔物)이 된다.

군 조직은 서해 교전에 참여한 전투원들을 더욱 영웅시하고 신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서해의 진실에 접근하는 길은 더욱 봉쇄되고, 모든 교전을 둘러싼 진실은 군 조직이 독점하며, 더 이상의 공론화를 봉쇄한다. 묻지도 않고 답하지도 않는 암흑시대에서 전문가들은 더 이상의 연구를 포기한다. 이것이 서해의 진실을 수장하는 원인이 된다.

필자는 서해에 바야흐로 결전의 시대가 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언젠가 남북한 간에 대규모 충돌이 벌어진다면 그 무대는 서해가 될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6가지 논리가 작동한다.

첫째, 국가의 핵심 이익이 있는 서해에서 남북한은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남북한은 서해가 국가의 핵심 이익이라고 판단하고 핵심 무기체계와 신속한 지휘체계를 전진 배치하고 있다. 그에 따라 군사적 위험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둘째, 남북한 분쟁에 편승한 강대국의 재균형 정책이 평화를 파괴한다. 주변국은 남북한의 이러한 대립을 완화하기보다 자신들이 개입해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로 움직인다. 이들에게는 남북한이 짊어져야 할 막대한 희생과 부담이 ‘강 건너 불’이다.

국민에게 진실 밝혀야

셋째, 국가 장기 전략과 시스템 붕괴가 해역의 안정을 파괴했다. 해역에서 억지력을 갖춰서 방위한다는 건 국가가 우선적으로 고려할 대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일시적인 반면 장기적인 전략과 유능한 시스템은 지속적이다.

넷째, 군에 대한 문민 통제의 실종이 평화를 파괴했다. 군사작전을 계획하는 과정에 정부의 통제가 느슨하게 작동하면 국방부가 남북관계 전체를 주도하게 된다.

다섯째, 작전본부와 사령부의 무능이 평화를 파괴했다. 특정 군과 특정 전문성이 배타적, 패권적으로 작동하는 합동참모본부는 위기 때마다 해군과 갈등을 겪었고, 위기 이후에도 더 심각한 감정적 후유증으로 인해 협조와 조정에 무능한 일면을 드러냈다.

여섯째, 안보 실패를 국내 정치적 논란으로 확대한 정치권력이야말로 가장 큰 평화의 적이다. 안보 실패의 원인을 군 조직 탓, 정치적 반대자 탓으로 전가하면 안보의 본질이 국내정치에 의해 왜곡되고 굴절된다.

이러한 내외적 요인을 감안해 우리는 서해 평화 정착을 위해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우리 정치권력은 과거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첫째, 자신의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서해에서 평화와 안정, 협력을 도모할 수 있는 불굴의 정치 리더십이 필요하다. 국내 정치적 요인으로부터 탈피해 평화와 안보 문제를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있는 정치권력이 안보의 제1 조건이다.

둘째, 국가의 외교, 군사, 정보력을 효과적으로 결집하기 위해 유능한 관료와 효율적인 위기관리 시스템이 준비돼야 한다. 각기 다른 전문성이 존중과 배려의 정신으로 재결합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준비돼야 한다.

셋째, 새로운 평화공존의 시대에 대한 비전과 전략이다. 무엇보다 한반도 정세를 우리가 주도한다는 정권 차원의 결의가 나와야 하고, 서해 평화를 정착하기 위한 탄탄한 전문성과 행동전략이 구체화해야 한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가 지난 시기 교전의 진상을 투명하게 밝히고 국민에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질문을 하지 않고 설명을 하지 않는 정부는 위험하다.

김종대  군사평론가, ‘시크릿파일 서해전쟁’ 저자
<이 기사는 신동아 10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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