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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간 1904승 9무 810패… “내 바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입력 | 2013-10-09 03:00:00

■ 2000승 향해 전진하는 ‘반상의 황제’ 조훈현 9단




조훈현 9단이 어느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1900승 고지에 우뚝 올라섰다. 사상 최연소인 9세 7개월에 입단한 뒤 50년 11개월 만이다. 세계 바둑계를 호령하며 많은 기록을 양산한 그는 “가능하면 100승을 더 채우고 싶다”고 말 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 바둑판 위에서 50년 11개월간 수많은 승부사들과 싸운 조훈현 9단(60), 그가 1900승을 넘어섰다. 세계 어느 기사도 가보지 못한 경지다. 8일 현재 공식 전적은 1904승 9무 810패. 승률 70%. 일본 최다승인 조치훈 9단(1423승)이 그를 따라잡을지 의문이고, 제자 이창호 9단(1646승)도 아직은 멀리 있다. 전성기 때와 같은 갈채는 사라졌지만 그는 마라토너처럼 꾸준히 2000승을 향해 달리고 있다. 속도는 많이 더뎌졌지만…. 7일 서울 청계천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앞으로 5년 또는 10년, 아니면 아예 이루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100승을 더 채우고 싶다”고 말했다. 》

만 9세 7개월에 최연소 프로가 된 그는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 ‘조 제비’ ‘전신(戰神)’ ‘바둑황제’ ‘영원한 국수’로 불리며 팬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올해 57기를 맞은 국수전에서 16차례나 우승했던 그는 여전히 ‘국수’로 불린다.

조 국수에게 기억나는 몇 장면을 꼽아 달라고 했다. “1989년 초대 잉창치(應昌期) 배에서 중국 ‘철의 수문장’ 녜웨이핑((섭,접)衛平)을 누르고 우승한 것”이라고 먼저 꼽았다. 당시 그는 불리한 여건에서도 극적으로 우승해 바둑의 변방이던 한국을 일약 중앙으로 끌어올렸다. 바둑계뿐 아니라 나라 전체가 들썩인 사건이었다.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고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또 10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9단의 내제자로 들어간 일, 27세에 처음 전관왕을 해낸 일, 31세에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들인 일, 49세에 세계대회인 삼성화재배에서 최고령 우승한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세고에는 하시모토 우타로(橋本宇太郞)와 우칭위안(吳淸源), 그리고 조훈현 단 세 명만 제자로 받았다.

조 국수의 바둑 인생에 빼놓을 수 없는 두 기사 서봉수 9단과 이창호에 대해 물었다. 동갑 서봉수와는 15년간 300여 차례나 겨뤘다. 조훈현이 2 대 1 비율로 우세했지만 서봉수는 늘 그 앞에 다시 섰다. 서봉수에 대해서는 “승부 근성이 뛰어난 기사”, 이창호에 대해선 “처음에는 둔하게 보였지만 눈에 안 보이는 천재”라고 말했다. 언젠가 이창호에게 “왜 승부사가 물러서기만 하느냐”고 질책 섞인 질문을 했더니 “‘싸우다 보면 1%라도 질 가능성이 있는데 물러서면 반집이라도 이기는 길이 보여 그랬습니다’라고 어눌하게 답해 머쓱했던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올해 4차례 세계대회 개인전에서 모두 중국에 우승컵을 내줄 정도로 부진한 한국 바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요즘 중국에선 바둑학원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국가의 지원도 탄탄하다. 그게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우리의 바둑 인기는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일본처럼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대표 상비군 체제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이세돌 등 정상권이 더 버텨줄 것이라 믿는다.”

그는 바둑계에서 운전면허와 신용카드, 휴대전화가 없는 ‘3무(無)’로 유명하다. 이에 대해 묻자 “이제는 1무다. 운전면허까지 따야 할지 고민”이라며 웃었다.

―정상에 오래 머물렀고 세계 최강의 제자도 길러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여전히 성적을 내고 싶다. 제자도 키우고 싶지만 그 일은 여건과 인연이 맞아야 한다. 그동안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돌려줄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아마추어가 있기에 프로가 있는 것이다.”

자녀에게 바둑을 가르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물었다. 부인 정미화 씨와의 사이에 1남 2녀. “바둑의 ‘끼’가 없었다. 억지로 가르쳐서 크게 될 수는 없기에 일찍 포기했다”고 말했다.

―끝으로 조 국수에게 바둑은 무엇인가.

“세상에는 여러 길이 있다. 돈을 벌 수도 직장에서 성공할 수도 있다. 돌아보면, 나는 네 살 때 아버지 품에서 바라본 바둑이 좋아 택한 길이다. 어떤 분야든 누구든지 끝까지 가다 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고 본다. 또 정상은 어떤 면에서 서로 통한다. 이런 인생도 저런 인생도 있는데 나는 그중 하나를 걸어갈 뿐이다.”

조 국수는 골프 때문에 뜸해졌지만 요즘도 체력 단련을 위해 평창동 집 근처에 있는 북한산을 오른다.

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