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문서로 드러난 백정기 의사의 ‘육삼정 의거’ 전말
최초로 찾은 일본 외무성 의거 관련 문서 표지. 오른쪽에 ‘아리요시 공사 암살 음모 사건’이라고 적혀 있다. 더채널 김광만 PD 제공(왼쪽). 1946년 백범 김구와 청뢰 이강훈이 주도한 ‘3의사유해봉환위원회’가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일본에서 고국으로 모셔왔을 때의 사진. 삼의사 유해는 4월 19일 서울에 도착했고 7월 6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됐다. 동아일보DB
그들은 당당했다. 오직 적을 죽이지 못해 아쉬웠을 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이강훈은 일제 재판관을 향해 오히려 “수고했다”며 기개를 드러냈고, 백정기 의사는 “모두 내가 주도했으니 자신만 처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폐병을 앓았던 백 의사는 곧 죽을 운명임을 직감하고 동지들이라도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육삼정 의거는 흔히 실패한 거사로 인식돼 왔다. 가장 큰 목표였던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공사를 처단하지 못한 데다 관련자 대부분이 검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문서들을 살펴보면 공사를 제거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의거의 성과는 작지 않다. 1933년 11월 11일 동아일보에 ‘조선인을 중심으로 한 상해의 국제 흑(黑)테로단’으로 크게 소개되며 민족의 자긍심을 높였고, 육삼정에서 벌어진 일제와 중국국민당 친일파의 협잡도 세상에 알렸다.
단적인 예가 문서에 나오는 백 의사의 도시락 폭탄이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투척했던 것과 같은 ‘쌍둥이 폭탄’이다. 백범이 비밀 제조업자에게 의뢰해 만든 도시락 형태의 폭탄 7개 가운데 하나였다. 그 하나를 윤 의사가 먼저 썼고, 나머지를 백범이 아나키스트 독립운동단체였던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지도자 정화암(1896∼1981)에게 보냈는데 백 의사가 이것을 쓰려다 체포된 것이다. 일제는 내부 문건에 도시락의 구체적인 모습을 담아놓았다. 가로세로 16.21×10.45cm, 높이 5cm라고 크기까지 묘사했다.
일제로서는 육삼정 의거로 백 의사 세력을 체포한 것은 큰 성과였다. 백 의사는 이미 친일파 이규서 연충열 이종흥을 처단해 일제엔 ‘특급 테러리스트’로 분류돼 있었다. 이강훈 원심창 정화암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때문에 문서에는 관련자들이 어떤 인물인지, 어디에서 은신하고 있는지를 진작부터 치밀하게 감시해왔음이 기록돼 있다.
육삼정 의거와 관련해서도 일제는 밀정을 통해 시기나 방법을 사전에 구체적으로 보고받았음이 드러났다. 일제가 그린 지도에는 백정기 이강훈이 폭탄 투척을 주도하고 원심창과 우당 이회영(1867∼1932)의 아들인 이규창(1913∼2005)이 망을 본 뒤 함께 도주하는 루트까지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56)는 “회고와 증언만 남아있던 육삼정 의거를 다룬 공식 문서가 나온 것은 최초”라며 “의거 관련 담당 경찰의 비공식 의견까지 포함됐을 정도로 내용이 상세해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번에 문서를 찾는 데는 동북역사재단 동북아시민협력사업의 지원을 받은 구파 백정기 의사 기념사업회(회장 유성엽 민주당 의원)의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 내년 백 의사의 순국 80주년을 맞는 기념사업회 측이 근대사를 추적해온 김광만 PD와 함께 적극적으로 자료 조사에 나섰다.
유 의원은 “백 의사는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큰 인물이나 상대적으로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며 “이번 문서 발굴을 의사의 숭고한 뜻을 깊게 새기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